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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설교문

생명나무의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 (창3:24)

by 다바르아마르 2020. 6. 22.

 3: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구원: 밖에서 안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사람을 쫓아낸 이유는(샬라흐) 밖에서 다시 들어오는 과정을 통해서 그에게 하나님이 누구이며, 구원이 무엇이고, 천국이 어떤 것인지를 바르게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구원은 에덴동산 동편에서 서쪽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설명하신 것이고, 성막도 동쪽에서 서쪽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통해서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성전 마당에서 안으로 

성전 마당에서부터 번제단, 물두멍, 떡상, 일곱등불, 향단, 언약궤들은 우리의 구원을 설명하기 위한 모형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전 마당에서(율법에서) 성전 안으로(진리로) 들어오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지 못하는 이유는 율법의 모형 안에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형이 전부인줄 알고, 그 모형이 모든 것인 줄 알고 살아가는 것을 악에 빠져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길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언약궤) 안식하는 것을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생명나무의 길을 하나님께서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막으셨습니다. 그러면 그룹들과 불 칼을 통과해야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24

바가라쉬 에트 하아담 (그리고 쫓아 냈다. 그 사람을)

바샤칸 미케뎀 레간 에덴 (그리고 두었다. 에덴 동산의 동쪽에)

에트 하케루브 에트 라하트 하헤레브 하하파크(그 그룹들과 뒤집어엎는 불붙는 그 칼을)

레사마르 에트 데레크 에프 하하이(지키고 있다. 생명나무 길을)

 

생명나무 길을 막고 있는 수문장 

생명나무의 길을 막고 있는 수문장은 그룹 두루 도는 불 칼입니다. 생명나무를 먹기 위해서는(생명을 얻음) 그룹과 두루 도는 불 칼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룹을 히브리어로 보면 케루브라고 합니다. 흔히 천사와 같은 존재인데,  케루브를 한글성경은 그룹으로 번역했습니다. “케루브는 구약성경에 91회 정도 사용되었는데, 가장 많이 사용된 곳이 바로 성막입니다.

 

속죄소 위에 있는 그룹

 25:18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19  [그룹은] 이 끝에,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하게 할찌며 20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휘장에 있는 그룹

 26:1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 놓아 만들찌니 31 너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공교히 수 놓아서

 

성막 :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 

성막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 성막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받고 사유하심의 은혜를 받으며, 용서와 구원을 경험하는 특별하게 구별된 신적 장소가 바로 성막입니다. 이 성막은 궁극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도가 경험하는 은혜와 구원을 예표하는 것입니다.(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용서하시는 은총을 받게 됩니다. 이 성막의 가장 은밀한 장소가 바로 지성소입니다.

 

 7:8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씀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은혜의 장소를 막고 있는 그룹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에 그룹과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속죄소 위에(시은 좌) 그룹이 있습니다. 성막 안에 있는 그룹이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의 길을 막고 있는 그룹들과 같다는 것은 에덴동산 중앙의 생명나무의 길 지성소의 속죄소의 시은 좌가 결국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룹이 있는 곳은 곧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고, 그곳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만나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불꽃이 피어나는 변화시키는 칼 

그런데 생명나무의 길을 막고 있는 것은 그룹만 있는 것이 아니라, 칼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칼은 불 칼인데, 두루 도는 불 칼입니다. 원문으로 보면 라하트 하헤레브 하하파크입니다. “라하트 불꽃이란 뜻이고 헤레브 이고, “하파크 변화시키는, 뒤집어엎는이란 뜻으로 직역하면, “뒤집어엎는 불꽃이 피는 칼 칼의 모양은 불꽃이 있고, 기능은 뒤집어엎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칼은 심판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불은 하나님의 임재, 혹은 심판을 상징합니다. 이 불 칼이 뒤집어엎는(하파크)  이라는 것은 칼 맞은 자에게 일어나는 기능과 효과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 칼을 맞은 자 에게 일어나는 일은 무엇일까요?

 

불 칼을 맞은 성도에게 일어나는 것

에덴동산 밖에서, 혹은 성막(성전) 마당에서 사람들이 행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살인하는 것”(도륙하는 것, 희생제사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 밖을 상징되는 창세가 4장에서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는 장면이 나오고, 가인이 성을 쌓으며(간음) 인류의 문명의 발전과 전쟁 무기를 만드는 장면이 나옵니다.(거짓증거, 탐심)

 

자기를 자기로 의미화 함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으면 반드시 자기를 자기로 정당화하기 위한 자기 성 쌓기를 행하며 살아갑니다. 나를 나로 정당화하고, 나를 나로 확장하며 자신의 이름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에덴동산 밖에서, 성전 마당에서 살인하며, 도륙하며, 간음하고, 거짓말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가인과 셋의 자손들 

그러나 생명나무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언약 백성의 삶은 완전 반대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의 자손들의 모습과 5장의 셋의 자손들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기술되는 것입니다.

 

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4: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 에녹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11: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가인성과 바벨성 

가인자손들은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키며 확장해 갑니다. 그리고 그 문명은 창세기11장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대한 바벨탑 운동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성전 밖에서 인간이 행하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의 문명과 대조적으로 셋의 문명은 별 것 없습니다. 자손을 낳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다가 죽습니다. 그리고 노아(안식)까지 이르게 됩니다

 

5:4 아담 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 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 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15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 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 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5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6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28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 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 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5: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말씀 : 좌우에 날 선 검 

그러면 성도가 칼을 맞는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나를 나로 규정하고, 확장하는 그 나의 죽임이 두루 도는 불 칼로 경험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나무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양날가진 검으로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 마음의 생각과 뜻을 드러내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것 같더라

 

 2: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2:35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그리스도의 말 

그 생명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두루 도는 불 칼로 선포되는 그리스도의 말을 통해 자기 성 쌓기의 삶이 무너지고 성전 안으로 지성소의 언약 안으로 들어오는 삶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진리의 칼로 경험되는 그리스도의 말씀

진리라는 것은 많이 공부하고, 체계적으로 공부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제자훈련에서 지향하는 확신반, 성장반, 제자반, 사역자반 이런 식의 단계를 밟고 올라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존재의 심연의 영역 

기독교 신앙의 본질, 하나님의 임재의 심연은 성경을 배우고, 제자훈련의 단계를 밟고, 성경을 체계적으로 학습하는 것을 통해서 경험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공부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본질은 우리 각자의 존재의 심연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존재의 원리이고 삶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존재의 원리이고 삶의 방식이란 것은 내가 그 진리의 실체를 체험하고, 그 진리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공부하고 연구해서 객관적으로 분석되어진 앎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그 속에 거하는 것이고, 그 진리가 나를 장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씨가 실제로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 들어오는 실재라는 것입니다.

 

생명나무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가 생명나무의 길에 도달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생명나무의 길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종교적인 고행을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생명나무의 길에 도달하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도덕적, 윤리적 수양을 쌓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단계를 밟아 성경을 배우고, 신학적 체계를 가지고 하나님을 연구하라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 진리의 생명의 본질이 있습니다. 그 생명나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기독교는 존재의 원리이고 삶의 방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 수동적인 것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입장에서 수동적이면서 능동적입니다. 생명나무는 우리가 노력하고 힘써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절대적으로 수동적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시지 않으시면 우리의 어떤 노력으로도 얻을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진리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깜짝깜짝 놀랍니다. 어떻게 이런 진리의 말씀이 나에게 들리고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까? 내가 능동적으로 무엇인가 행하기 이전에 하나님이 나에게 주권적으로 은혜를 베푸시고, 진리를 건네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은 내가 하나님께 도달하기 위해 힘쓰고 애쓰는 수고와 그에 따르는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나에게 오시는 것에 대한 고백이고, 감사이며, 앎이고,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능동적인 것 

그런데 이 은혜 안에 우리의 열심을 이끌어 내는 능동적인 행위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여자 자궁에 생명이 잉태되는 것과 같습니다. 여자가 아무리 건강하고 튼튼해도 생명의 씨는 밖에서 들어와야 합니다. 생명은 여자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생명의 씨가 수정되고, 착상되어 자라는 과정과 출산 속에는 능동적인 생명의 이끄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자의 모든 것이 그 생명으로 함몰되고, 희생되고, 공급됩니다. 그것을 진리 안에서 성도가 행하는 선한 행실, 열심, 수고라고 합니다.

 

생명나무로 이끄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이렇게 그 진리로 우리를 생명나무의 길로 이끄십니다. 이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로 순종하게 하고, 찬양하게 하며, 감사하게 하고, 기도하게 합니다. 주께서 보이신 생명의 길로, 주의 생명으로 살아가시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