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 테홈에서 흘러나오는 파괴의 물 (창6장17-22)
창6: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20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21 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파괴하는 물
창세기 6장 17절부터 22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홍수와 관련하여 명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홍수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역이고, 구원의 사건입니다. 홍수(洪水)는 원어로 “맙불 마임”입니다. “홍”(洪)으로 번역된 “맙불”은 그 유래가 “파괴하다, 폭풍우”에서 왔습니다. 한자로 “넓다, 크다”로 번역을 했는데, 단순히 크고 넓은 개념 정도가 아니라, 많은 물로 파괴할 수 있는 개념이 “맙불”입니다. 그래서 “맙불 마임”을 쉽게 번역하면 “파괴하는 물” 정도로 할 수 있습니다.
홍수를 이끌어오시는 하나님
그래서 그 홍수는 땅에 있는 모든 육체를 멸절하리니 라고 하는 것입니다. 홍수를 일으킨다고 하는데, “일으키”다가 “보”란 단어로 가장 기본적인 뜻이 “가다, 오다”란 뜻입니다. 히필분사형으로 되어 있어서 “홍수를 이끌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에게 이끌었던 것처럼 그렇게 홍수를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에게 이끄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에 홍수가 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파괴의 물, 진리의 말씀이 임하는 것을 상징하고 예표하는 것입니다.
파괴하는 진리의 물
이렇게 홍수를 이끌어서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를 멸절시키신다고 합니다. “멸절”이 “샤하트”로서 “멸망시키다, 파멸하다”란 뜻입니다. 이 단어는 홍수뿐만 아니라, 불과 유황 등으로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시킬 때도 사용된 단어입니다.
창 19:14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방주로 몰아가는 홍수
그런데 어디에 있는 것을 멸하신다고 하시냐면 땅에 있는 것을 멸하신다고 합니다. 홍수라는 파괴의 물, 다시 말해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옛 자아를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구원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파괴하는 말씀에 휩싸여, 그 말씀에 휩쓸려가는 것입니다. 그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휩쓸어 가는데, 어디로 가냐면 방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기능과 목표
어떤 사람은 말씀의 기능과 목표를 오해합니다. 말씀은 우리를 해체하고, 깨뜨리고, 무너뜨리는 것만이 말씀의 목적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옛 자아를 무너뜨린다함은 새로운 자아를 세운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깨뜨리고, 무너뜨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로 덮어주시고, 세워주시는 것이 목표인 것입니다.
방주, 그리스도와 성전
이렇게 땅에 있는 우리의 옛 자아가 죽는 것이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한 마디로 그리스도와 성전의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파괴하는 물로 오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성전 안으로 휘몰아쳐 이끌어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몰아가시는 하나님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파괴의 물을 통해 방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홍수로 우리를 몰아가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파괴하다”의 본질은 몰아가다가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언약이라고 합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언약의 당사자인 우리를 그 언약대로 이끌어 가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의지와 주도성을 내포하고 있는 약속이며, 상징입니다.
성전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방주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다른 말로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또한 골방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전 안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이끌어 가심) 그 안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어떤 사역을 하셨고, 그 사역이 어떻게 우리를 의롭게 하며, 구원에 이르며 정결하게 하셨는지를 보고 경험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밖에서부터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파괴의 물, 홍수가 되어 우리를 진리의 지성소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구원 경험은 자신이 계획과 의지로 행한 것이 아니라, 말씀의 거대한 힘에 휩쓸려가는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성도의 구원을 큰 물, 큰 파도, 폭풍우 등과 관련하여 설명합니다.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 7:11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출 15:8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시 78:15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매우 깊은 곳에서 나오는 물처럼] 흡족하게 마시게 하셨으며
욘 2:5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테홈, 매우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진리의 물
여기서 말하는 큰 물은 “테홈”으로 “깊은 물, 심연”이란 뜻입니다. 홍수의 그 물은 바로 깊음의 샘이 터져 나온 물입니다. 땅의 있는 생명을 파괴하는 진리의 물이 바로 “테홈”에서 흘러나왔다는 것입니다. 이 테홈은 성도들 안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정신적, 내적인 깊은 그 무엇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생각과 관념과 정신의 깊은 그 무엇, 그래서 나 자신도 정확하게 정의 할 수 없는 무저갱과 같은 우리의 내면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테홈”에서 홍수는 바로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구약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영혼의 깊은 곳까지 에워 쌓였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홍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테홈에서 터지는 물로서 강력한 그리스도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땅에서 땅의 호흡을 하는 우리의 옛 자아가 죽을 때 까지 추격하는 하나님의 주권이며 “열심”인 것입니다.
시 48:14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진리의 죽음으로 이끌어 가심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를 원문을 근거로 직역을 하면 우리를 “죽음 위로(곁에) 이끄심”입니다. 구약시대 무트(진리의 죽음)의 죽음이 있는 그곳이 성전의 지성소, 속죄소입니다. 그 죽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고, 그 안에는 인간의 죄와 악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죽음을 향해 인도하십니다. “인도하시리라”가 “나하그”입니다. 쉽게 말해 몰아가고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또한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시 23: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하나님의 라다프
“따르니라”가 “라다프”로서 “추격하다, 괴롭히다, 박해하다”란 뜻으로 군대가 추격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그의 인생을 통해서 확신한 것은 자신의 구원의 확신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그 추격하심, 따라오심에 대한 확신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과 인자하심이 다윗을 추적하여, 그에게 휘몰아침으로 그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선과 인자는 결국 노아시대 때 홍수로 임한 하나님의 파괴의 물이 성도의 역사 속에서 확장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홍수로 경험하는 파괴의 물의 내용은 사실 하나님의 “토브(선)”이며, “헤세드(인자)”인 것입니다. 그 홍수를 “토브”와 “헤세드”로 보지 못하니까 홍수가 이끄는 방주 안의 안식과 양식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똑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임하는 진리의 말씀이 들리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선과 인자와는 상관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하나님의 파괴의 물이 자신을 추격하고, 휘몰아가서 자신을 여호와의 집, 성전 안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그의 인생을 통해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집은 성전입니다. 성전 안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은 실제로 그 안에 거주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성전 안 속죄소의 은혜 안에 거주하며 그 은혜의 열매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요한복음의 말씀은 하나님과 성도가 성전 안에서 연합되고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교회의 죽음 안에서 서로 죽어 그 죽음 속에 생명과 사랑이 흘러나오는 교회의 구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노아, 방주, 성전, 그리스도
그러니까 노아의 방주는 그리스와 성전의 이야기입니다. 방주이야기를 잘 보세요. 어떤 이야기입니까? 홍수가 있고, 그 홍수 때문에 땅에 있는 생명이 다 죽게 되어, 하나님이 보존하기로 한 생명은 방주 안으로 들어감으로 생명이 보존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방주가 뜨기 위해서는 물이 가득해야 하는 것이지만, 또 다른 편으로는 땅에 있는 생명이 죽어야 방주가 뜨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겉 사람의 생명으로 살고 있는 내가 멸절당해야 방주의 안식과 구원과 안전과 평안을 경험할 수 있다는 의미기이고 합니다.
홍수와 세례
이 홍수를 바울이나, 베드로는 세례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세례는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살아남으로, 그 세례 주는 자, 즉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 되고, 연합되는 구원의 내용을 아주 쉽게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21 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먹을 양식을 저축하라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노아에게 먹을 양식을 저축하라고 하십니다. 저축하라가 “아사프”로서 “모으다”란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양식을 모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양식은 단순히 육체를 위한 양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를 위한 양식은 오늘의 양식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리의 양식은 오늘의 양식이 아니라, 내일의 양식입니다. 영원의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내일의 양식을 준비하라
짐승으로 살고 있는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내일의 양식을 준비하게 하시는 분도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 우리로 기도하라고 명하신 것이 “일용할 양식”입니다. “일용할”이 “에피우시오스”로서 “매일의”란 뜻과 함께 “다가오는 날을 위한”이란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의도하신 일용할 양식은 매일 매일 필요한 육체의 양식이 아니라, 다가오는 날, 즉 영원의 날에 필요한 양식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양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노아는 이미 홍수와 방주를 통해서 그 양식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여덟로 살아가는 교회
그런 의미에서 사실 노아의 방주는 안식을 상징하는 노아와, 파괴의 물을 상징하는 홍수를 통해 성전의 지성소를 상징하는 나무상자 안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을 비밀스러운 상징으로 감추어 선포하신 것입니다. 방주 안에서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여덟로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진리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는 여덟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교회는 안식 후 첫 번째 날을 이 역사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활의 삶이라고도 하고, 재림의 삶이라고도 하며, 평안과 안식의 삶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방주라는 “테바”를 통해, 지성소의 속죄소의 은혜를 경험하시고, “테홈(깊은 물, 심연)”의 깊은 “아뷧소스(무저갱)” 안에서 파괴하는 진리의 물로 휘몰아치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경험하여 그리스도가 준비한 내일의 양식을 받으며 살아가는 중앙의 식구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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