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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설교문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는 하나님

by 다바르아마르 2020. 7. 5.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하나님

선악나무를 먹은 아담과 하와에게 내린 저주는 죄로 말미암는 심판과 형벌이 아니라, 이 인생과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성도를 구원해 가실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21절이 한마디로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원문으로 보면

바아사(그리고 그가 만드신다) 예호와 엘로힘(여호와 하나님이) 레아담(아담에게) 바레잇샤(그리고 아내에게) 케토네트(옷을) 오르(가죽) 바라바쉬(그리고 입히신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시는 옷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에서 지어 아사라는 동사입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거의 대부분 동사가 문장 앞에 나옵니다. 그리고 그 동사에는 반드시 동작의 주체가 나옵니다. “아사의 문법을 보면, “와우-계속법, , 미완, 3인칭, 남성,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직역을 하면 그가 만든다.”(미완)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3인칭, 남성, 단수로 보기 어려운 것이 여호와는 고유명사이고, “엘로힘은 복수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도저히 문법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영원 속에, 영원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날 때 하나을 ”(3인칭, 남성, 단수)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 하나님이 계속해서 옷을 만드십니다.(미완료: 하나님의 행위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우리에게 적용되고 있다는 의미)

 

은혜는 입는 것입니다. 

이 옷은 누구를 위한 옷 입니까? 하나님에게 필요한 옷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에게 필요한 옷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입혀주기 위해서 여호와 엘로힘으로 불리는 그가” “ 직접 만드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은혜의 교리의 핵심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인간을 위한 옷을 만드시고 그 옷을 선악 나무를 먹은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본질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 드리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서 옷을 직접 만드시고, 입혀주시는 그 은혜를 입는 종교입니다.(내가 은혜를 입었음을 아는 것) 그래서 진리의 영역 안에는 그 은혜를 입은 사람(은혜를 입은 것을 아는 사람)과 입지 못한 사람으로 나뉠 뿐입니다.(은혜를 입은지 모르는 사람)

 

말씀을 듣는 태도 

예배나, 설교나 성경공부는 우리가 잘 듣고 감동을 받아서 이 세상 살아가는데 적용할 내용을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진리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번영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영으로 거듭나지 않는 사람은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이 땅에 필요한 양식이 아니라, 내일의 양식, 다가오는 날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밥 벌어 먹고 사는데(자아의 성취) 적용할 내용이 아니라, 다가오는 날의, 묵시의 나라에서 필요한 양식입니다.

 

진리에 낚여진 자들은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 하님의 진리에 의해 낚여진 하나님의 백성이 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이 고아와 과부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인도하신다고 하십니다.(14:18) 성경과 설교와 성경 공부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설교를 들을 때 전망적인 기대, 즉 세상에 살면서 적용할 내용을 듣는 것이 아니라, 회고적으로 즉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인도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지를 돌아보면서(기억하면서) 들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6일이라는 이 역사 속에서 열심히 주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7일이라는 안식의 날을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분이 하시는 일을 믿는 것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것을 어찌 믿겠습니까? 6일 동안 힘써 주의 일을 하지(믿지) 않는 자에게 어떻게 7일째 되는 날의 안식이 주어지겠습니까?

 

설교의 핵심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그 입혀진 은혜가 무엇인지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성경이고, 설교이며, 성경공부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입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있기는 있는데 구체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벙어리 냉가슴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잘 까먹고 잊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렇게 날짜와 장소를 정해서 우리에게 입혀진 그 은혜를 다시 듣고,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예배라는 형식으로,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목사를 세워서, 그 아버지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회집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옷을 입히심

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오늘 본문이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도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옷을 입다, 옷이 입혀지.”등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옷을 입은 자와 옷을 입지 못한 자, 옷이 입혀진 자와, 옷을 벗은 자라는 대조로 은혜와 유기를 설명하십니다.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11:7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11:28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가죽옷: 케토네트 오르

그런데 하나님이 만드시고, 입혀주신 옷을 가죽 옷이라고 합니다. “커토네트 오르인데 케토네트는 그냥 옷이 아니라, 제사장들이 입었던 긴 옷, 세마포 옷을 의미합니다. “오르는 동물의 가죽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옷을 입기 전에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만든 옷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벗은 줄 알고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 스스로 만든 옷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치마였습니다.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인간이 만든 율법의 치마 : 하고르 

치마라는 단어가 하고르인데 허리띠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정글에 가면 원주민들이 성기를 가리기 위해서 허리에 띠를 묶고 있습니다. 그런 정도의 띠를 만들어 입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히 인간이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리려는 율법적 의”(자기 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습니다. 선악 판단의 주인으로 자기 욕망의 충동의 노예로 살고 있는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진리의 옷 : 예수의 가죽 

구원은 이렇게 인간이 스스로 만든 옷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손으로 만든 가죽 옷을 입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죽(오르)은 동물의 가죽입니다. 이 가죽으로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릴 뿐만 아니라, 성막을 덮는 가죽으로도 사용했습니다.

 

27:15 리브가가 집 안 자기에게 있는 그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16 또 염소 새끼의 가죽을 그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입히고 21 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져보려 하노라 22 야곱이 그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이르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24 이삭이 이르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형의 옷을 입은 야곱 

야곱이 입었던 가죽 옷은 그의 형, 에서의 옷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야곱의 목소리를 듣고 야곱인지 알았지만, 에서의(첫째) 옷이였기 때문에 에서로 인정한 것입니다. 예수의 옷을 입으면 우리의 인격과 성품이 성인군자처럼 변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 야곱이 에서가 된 것이 아니라, 에서의 옷을 입고 있을 뿐입니다. 아버지는 목소리를 통해서 야곱인지 알고 있었지만, 에서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뭐라고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이유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 있는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예수처럼 변화 된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우리를 예수로 본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그의 존재는(속은) 예수가 아니지만, 예수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예수로 인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의 본질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것, 예수의 옷을 입는 것을 쉽고, 초급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옷을 입었으니 이제는 속도 예수처럼 변하자! 이렇게 말하는데, 예수의 옷을 입는 것 자체가 속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겉으로 입는 것 따로, 속이 변하는 것 따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세마포 흰옷 

성경은 예복을 입는 것과 입지 않는 것으로 구분하지, 예복을 입는 자의 변화된 인격과 성품으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옳은 행실은 인격과 성품이 도덕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세마포 옷을 입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마포 옷은 누구의 옷입니까? 예수님의 옷입니다. 이 옷을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고 쳐주시는 것입니다.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성도의 옳은 행실 

성도가 행하여야 할 옳은 행실은 세상 사람들에게 착하고 칭찬 받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믿는 성도는 세상에게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짜로 예수님을 잘 믿으면 예수를 잘 믿는 것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칭찬해 주지 않습니다. 만약 예수 믿는 것을 칭찬해 준다면,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지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오히려 의를 인해서 박해를 받습니다. 욕하고, 거짓으로 대하고, 악으로 대한다고 예수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율법적 선악구조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세마포 옷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만든 율법의 치마는 거짓이고, 오직 예수의 옷만이 나를 의롭게 한다는 것을 알아 그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성도의 옳은 행실입니다.

 

세상에선 불편한 예수의 옷 

요즘 누가 그 예수의 옷을 입고 다닙니까? 다 자기가 만든 자기 옷 입고 다니지! 그러니까 예수 믿는 게 아닙니다. 믿고 싶은 예수를 믿고, 듣고 싶은 예수를 듣고, 입고 싶은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예수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항상 불편해야 합니다. 내 속은 이렇게 검고 더러운데, 왜 이렇게 깨끗하고 하얀 옷을 주셨지, 진짜 어울리지 않아서 불편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도, 세상 사람들처럼 똑 같이 자식 걱정, 돈 걱정, 건강 걱정, 불안한 미래 걱정하면서 사는 것도 힘겨운데, 왜 이렇게 다른 사람들은 하지도 않고, 세상 사는데 별로 도움도 되지 않는 옷을 입고 다니는지 불편해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만든 내 옷이었으면 이미 다 벗었을 것인데 누가 만들어 주시고, 입혀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고 입혀 주셨습니다. 그래서 입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하얀 옷 입으면 내 속의 검은 마음을 항상 보게 되니까 불편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하얀 옷을 입지 않으니까 자기 마음이 검은 마음인지 모르고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의 거룩과 성도의 인격과 성도의 구별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 사는데 불편하시더라도 예수의 깨끗한 세마포 옷 입으시면서 잘 살아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