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드리기 위해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산에 올랐으며, 그곳에서 이삭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이처럼 3이란 숫자는 부활과 관련하여 수없이 등장한다.
마 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 12: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구약 말기의 선지자 요나도 3일 길을 걸었다. 니느웨 성 전도를 회피하고 다시스로 도망가다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간을 보낸 요나는 삼일이란 기간동안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니느웨 성 전도에 나섰다. 요나의 심판에 대한 선포는 니느웨 성 사람들을 악한 길에서 돌이켜 회개케 하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했다(욘1:17-2:2,3:3-10).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의 삼일은 니느웨 사람들을 온전히 구원하기 위한 기간이었다. 또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지낸 사흘은 예수께서 무덤(스올)에 삼일간 계셨다가 부활하실 것을 예표한 사건이기도 하다(마12:40).
눅13:32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눅13: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눅13: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예수가 말한 오늘, 내일, 모레가 3일길이다. 32절에 제3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고 말씀하였다. 즉 3일 만에 부활할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3일 길은 죽음과 부활의 길이다.
요2: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결혼식)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1062 gavmo" gamos {gam'-os}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결혼식’, 결혼 <마 22:2;눅 12:36>남명.wedding celebration;
사흘째 되던 날이란 것은 사흘에 라는 말이다. 사흘 후에라는 말이 아니다. 왜 이런 표현을 했을까?
또한 예루살렘 성전을 헐고 3일 만에 다시 지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요2:19).
성전시위사건을 보면 내가 사흘 안에 성전을 세우겠다라는 말씀을 하신다. 왜 하필 3일 안에 인가? 구원의 여정인 3일길(애굽-광야-가나안)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3일만에 부활하셨다. 3일은 죽음과 부활과 관련된 숫자이다. 요1:51의 성취를 나타낸다. 새창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새로운 성전을 세울 것이라는 말이다. 예루살렘성전에서 하는 제사는 더 이상 결혼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동물 제사는 새로운 피, 즉 포도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시위는 참된 예배의 길을 열기 위함이었다. 소, 양, 비둘기를 다 치우고 이제 자신의 죽음을 통해 새성전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이제 새성전(의)에는 주림과 목마름이 해결된 결혼잔치가 될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연합 즉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안에, 그리고 내가 너희안에 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새 성전이다. 새성전으로서 성도는 영생을 누린다. 영생이란 “하나님의 생명”이다. 요한은 결혼과 성전을 연결하고 있다. 즉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이처럼 가나의 혼인잔치는 새로운 성전을 말하기 위함이다. 새로운 성전은 예수의 죽음으로 세워질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가나 혼인 잔치의 메시지는 성전파괴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3일은 죽음과 부활의 숫자이다. 그것이 제사의 목적이다. 제사는 곧 자기 죽음이다. 자기 부인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 쉬운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자기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자기 기억이 없어지는 것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천국에서 모두가 이산가족 상봉하듯이 재회할 것을 꿈꾼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마 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참된 이름을 위하여 거짓 이름을 버리는 것이다. 집도, 형제도 자매도 부모도 자식도 땅도 모두 존재의 확장이다. 자식도 존재의 확장이다. 자기 존재의 부정이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가? 인간은 끊임없이 거부한다. 그 끊임없이 거부하는 존재가 바로 출애굽기의 바로이고, 신약에서는 헤롯대왕으로 나온다. 둘 다 세상 임금이다.
바로를 수천년 전에 나와 상관없는 인물이라고 본다면 오늘 본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바로는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대적자로 나온다. 그 대적자를 사탄이라고 한다. 베드로도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았을 때 사탄아! 라는 말을 들었다. 사탄은 뿔달린 귀신이 아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 그를 사탄이라고 한다. 그 사탄의 대표로 바로가 등장한 것이다. 그 바로를 세상 임금이라고 한다. 성경은 나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를 통한 “나의 구원”이 목적이다. 바로는 세상 임금으로 살아가던 옛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 임금으로, 옛사람으로 살아가던 나(무저갱)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과정이 3일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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