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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새벽기도 말씀

빛과 어두움 그리고 플라톤

by 다바르아마르 2020. 3. 20.

요1:4~5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이라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한다. 그는 호 로고스로서의 데오스’, 즉 그리스도를 뜻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생명이 있다. 이 생명을 빛으로 표현하고 있다. 로고스를 철학적 담론으로 중요하게 다룬 철학자는 BC 500년 경의 헤라클레이토스이다. 그는 생명을 불로 표현했다. 불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변화되고 생성 소멸의 과정을 거치는 것을 생명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제 요한기자는 불 대신에 빛을 거론한다. 불은 반드시 빛을 동반한다. 불과 빛은 동의어라고 말할 수 있다. 말씀에는 생명이 있다. 그 말은 이 말씀이 없는 자들은 생명이 없다는 사실이다.

 

4절의 그 사람들(호 안드로포스)는 그 빛을 깨달아 빛이 된 자들로, 5절의 그 어둠(호 스코티아, 어둠인 자들)과 대조를 이룸.

호 포스, 호 스코티아를 의인화하여 말씀하심.

 

생명이란 무엇인가?

버젓이 살아있는데 생명이 없다니? 무슨 말인가? 대부분 사람들은 이 몸이 생물학적으로 살아있는 것을 생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생명이란 영원한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몸만 살아 있으면 생명이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이 바로 어둠에 처한 자들이다. 멸하지 않는 생명, 바로 이 생명이 로고스 안에 있다는 말이다. 호 데오스가 호 로고스로 천지를 창조하였고, 호 로고스 안에 영생이 있다는 말이다.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영생이라고 한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의 천국을 영생/생명으로 표현한다. 영생은 다른 말로 천국이기도 한 것이다. 영생은 로고스와 직결되어있다. 왜냐하면 세상은 로고스로 움직이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다. 생명은 로고스 안에 있다. 다른 말로 ()나는 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명은 오로지 in Christ안에 있다는 것이다. 말씀(1장의 빛/오르)이 살아있는 자가 생명이 있고, 산 자라고 하는 것이다. 말씀(그리스도)없이 사는 자는 죽은 자이다. 생물학적 생명은 살아 있으나 영적 생명은 죽은 것이다. 지금 세상에서 아무리 잘나가고 떵떵거리고 살더라도 죽은 자들이다. 전혀 부러워 할 일이 아니다. 영생과 비교하면 너무나 하찮다.

 

이 생명을 얻는 것이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이다.

20:30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20: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데 이 말씀이 생명인데,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한다. 1장에 빛이 있으라! 할때 바로 그 빛(오르)이다. 따라서 1장의 그 빛은 바로 말씀, 로고스인 그리스도이다. 그런데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리고 만물은 말씀으로 창조되었다. 이 말씀이 생명이다. 사람은 이 말씀을 벗어나 살 수 없다.

 

1:5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에서 우리는 요한복음 당시의 헬라적 배경을 또다시 발견한다.  플라톤적 이원론이다. 요한복음에는 분명히 이원론적인 개념들이 있다. 예를들면 위와 아래라는 단어이다.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a[nwqen)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509  a[nwqen   anothen {an'-o-then}

507에서 유래;위로부터, 유추적으로 처음부터, 함축적으로 새로, 다시, 처음부터(맨처음), 꼭대기 < 27:51; 3:31>.from above;

 

니고데모에게 영생을 얻으려면 위로부터 나야 한다고 말했다. 왜 위로부터 나와야 하는가? 예수 자신이 위에서 아래로 보냄 받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아래로 보냄을 받은 목적은 아래의 사람들을 위의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예수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길을 열어놓았다. 그것이 십자가에 달려 아래에서 위로 들림받음이다(3:13-14). 이렇게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아래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빛을 받아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전형적인 헬라적인 이원론적 세계관이다. 즉 플라톤적 이원론이다.

 

플라톤 구원론과 성경의 구원관은 어떻게 다른가?

 

플라톤 주의는 위의 세계(이데아, 진리 또는 본질의 세계, 빛의세계, 영혼의 세계, 영원의 세계, 변화가 없는 세계)와 아래의 세계(본질의 반영인 현상, 곧 그림자, 모조품, 가짜의 세계, 암흑의 세계, 물질의 세계, 시간의 세계, 변화가 있는 세계)로 구분하는 세계관이다. 위는 빛의 세계이고 아래는 어둠의 세계이다. 위는 영원의 세계이고, 아래는 시간의 세계이다. 아래의 시간의 세계는 변화의 세계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있다. 그렇기에 아래의 세계에서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일들이 있다. 이런 위와 아래의 이원론적 세계관이 바로 플라톤이 정의한 전형적인 헬라적 세계관이다. 이런 세계관에 의하면 영혼은 물질인 몸 속에 갇힌 것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몸은 악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몸을 영혼의 무덤으로 보기도 한다. 따라서 구원은 당연히 이러한 몸에서 해방되어 위로 복귀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구원은 바로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래가 가짜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플라톤의 구원론이다.

 

그런데 이것은 힌두교나 불교와 상당히 유사한 개념이다. 즉 본질인 브라만의 다양한 투영이 우리가 경험하는 다양한 현상들이다. 불교용어로 말하면 삼라만상이다. 이것들은 모두 시간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생로병사가 계속되는 영겁의 윤회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이란 이런 시간적 존재에서 탈피하는 것을 말한다. 영겁의 윤회를 끊고 본질 세계로 귀환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식(수행)으로이루어진다. 산스크리트어와 헬라어 둘다 아리안 족의 말로 근본적으로 유사한 종교 체계를 낳은 것이다.

 

이러한 헬레니즘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그들이 가진 언어로 그리스도를 설명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위로부터 아래로 침투한 것이다. 그래서 위의 참 지식과 생명을 가져왔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얻는다. 스스로 깨달음으로 얻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어두움으로 침투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영생을 얻는 것이다. 공관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 천국이라는 용어를 많이 쓰는 대신, 요한복음은 영생이라는 단어를주로 사용한다. 같은 개념이다. 생명은 말씀이라는 빛이 어두움에 비쳐서 가능한 것이다.

 

스스로 구도/수행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은혜이다. 오직 은혜이다. 이것이 헬라철학과 다른 점이다. 그래서 잠언에는 지식의 근본은 여호와 경외라고했다. 은혜에는 경외가 있다. 진리라고 외치는 그곳에 경외가 없으면 하나님은 인격신이 아닌 추상적, 관념론적 神이 된다. 그래서 철학과 다름이 아닌 것으로 된다. 이것이 바벨탑의 함정이다. 모든 결론은 비슷해 보이지만 여호와 경외가 없으면 바벨탑이 되어 버린다. 쓰는 단어가 똑같다고 해도 경외가 없으면 참지식이 아니다. 참지식은 여호와 경외를 불러 일으킨다.

 

헬라철학은 스스로 지식을 얻음으로서 몸에서 해방된다고 생각하지만, 복음은 위에서 빛이 어둠에 침투하여 몸에서,  땅에서 천국이, 영생이 이루어진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래서 몸에서 벗어나거나, 시간계에서 벗어나 열반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됨을 말하고있다.  죽어서 가는 천국/구원이 아니라 바로 지금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플라토닉 언어를 차용하고 있지만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고타마싯타르타는 열반에 도달해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생명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을 강조하는 것은 예수의 말이아니요 사실은 플라톤이 말한 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부분은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을 따르고 있다고 봐야 하겠다. 대부분 이원론을 비판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이원론자이다. 영지주의가 이원론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지만, 그들이 사실은 영지주의자이다.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서양 신학 또한 플라톤 주의의 각주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우리는 깊이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또한 예수가 아닌 플라톤을 따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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