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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설교문

빛을 안다는 것은 나를 아는 것이다

by 다바르아마르 2020. 2. 9.

창세기1장은 빛--씨의 구조로 되어 있다

 

우선 무엇보다 창1장은 창조 그림이지만, 그 창조 안에 구원의 메시지가 담겨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그래서 창1장에 등장하는 모든 피조물(식물, 동물, 사람), 그 중에 대표적인 빛과 물과 씨도 복음을 담고 있는 것이다. 사물을 사물로만 본다면 복음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림에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다. 천지가 다 그림이다. 그리고 그 그림을 그린 이는 아버지이다. 그래서 천지는 곧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있다. 그 그림에 담겨 있는메시지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빛을 안다는 것은 아버지를 아는 것이고, 또한 나를 아는 것이다.

 

세상 모든 만물은 하나님을 알리는 계시요 그림이다. 천지가 다하나님을 알리는 극장이다. 그런데 우리가 빛이 없으면 사물을 볼 수 없다. 또한 빛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그래서 빛 자체가 에너지요 생명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이 빛을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식물이 빛이 없이 살 수 없고 사람이 빛이 없이 살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말씀 없이 살 수 없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다. 떡으로 공허함을 채울 수가 없다. 우리가 말씀을 배우는 이유도 그 말씀이 생명자체이기 때문이다. 꼭 무엇을 더 배우기 위한다기 보다는 그냥 사람이 밥을 먹듯이 말씀을 먹는 것이다.

 

빛은 창세기 1:3에서 처음으로 생겨났다. 창세기 1:2절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고 계셨다. 그러니까 본래는 다 흑암이었고 어둠이었다. 그런데 그 어둠에 빛이임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이 빛과 어둠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빛과 어둠이 아니다. 우리가 볼 수 있도록 해주고 식물이 광합성을 하도록해주는 태양빛은 넷째 날에 창조가 된다. 그러니까 창1:3절의 빛은 보이는 빛이 아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그 빛의 정체가 구체적으로 들어난다. 요한복음 1장은 창세기 1장의해설서이다.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5 (fw'")이 어둠에 비치되(faivnw)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1:1-5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는데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고 그가 없이는 하나도 되어진 것이 없었다. 바로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는데 그 생명이 바로 빛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빛은 말씀의 생명이다. 빛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이다.

 

5457 fw'" phos {foce}

폐어된phao<프하오>(‘반짝이다’, 또는특히 빛에 의해드러나게 하다’; 5316, 5346과 비교)에서 유래;‘발광’(광범위한 적용으로 자연적이거나 인공적으로, 추상적이거나 구체적으로, 문자적이거나 상징적으로), , <1:4; 3:9>. light;

 

5316 faivnw phaino {fah'-ee-no}

5457의 연장형;‘밝게(빛나게)하다’, 보이다’(타동사나 자동사,문자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비치다 <2:7>. togive light;

 

그런데 그 빛의 역할은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보이게하는 것이다. 빛은 어두움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어둠은 무엇인가?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9절을 보면 참 빛이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고 그가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다고 했다. 여기서 쓰인 세상이라는 단어들이 바로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을 때의 그 세상과 같은 코스모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코스모스라고 한다. 현대인이 코스모스라는 말을 들으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눈에 보이는 우주를 뜻하는 세상)를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헬라개념이다. 코스모스는 우리가 사는 터전 자체이다. 그리고 그 코스모스를 집약적으로 그려 놓은 것이 성막이다. 그래서 성전이 곧 코스모스이기도 하다. 성막은 곧 코스모스의 집약이다. 그리고 성막은 곧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래서 성경에서 세상이라고 함은 곧 사람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래서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1:10)고 하는 것이다. 세상이 단순히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눈에 보이는 우주)라면 이런 표현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모세가 만든 성막을 보면 모든 성구가 차례차례로 차서있게 순서적으로 배열이 되어 있다. 그래서 코스모스(질서)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성전은 율법을 그림으로 교육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글이라는 것을 몰랐다. 글로 되어 있는 율법을 그림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 곧 성막이다.

 

5: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의 말씀을 새롭게 풀어서 전해주었다. 그런데 그 구약의 성전, 율법이 다 호 코스모스인데 그들을 그대로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들은 다 어둠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어둠이라는 세상(호 코스모스)에서 하나님의 말씀 즉 생명 되시고 빛이신 이가 나타나신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은 그 빛 되신 생명의 말씀을 몰라본다. 그런데 그중에 그 빛을 알아보고 빛의 아들들이 되는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5:8 너희가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벧전2: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하려 하심이라

1:13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우리는 다 어둠이었는데 빛으로 오신 그분의말씀을 듣고 어둠에서 빛으로 나온자가 되었다고 했다. 그 말은 빛이신 그 분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분이 말씀으로 오셨는데 그 말씀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이 빛이라고 했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저 어둠이라는 호 코스모스에서 불러내어 빛이신 그와 하나가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빛이라는 것을 어떤 광채를 발하는 그 빛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우리가 빛이 되었다는 것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절대 볼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주시려는 것을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담아서 땅의 것으로 먼저 주셨다. 그런데 그것을 그냥 땅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그대로 보면 그것이 어둠이다. 하지만 그 껍데기 호 코스모스를 보면서 그 안에 담아서 주시려고 하는 그것으로 보게 되면 그렇게 보고 있는 우리가 빛이다. 그러니까 빛이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우리가 동일하게 보면 우리도 빛이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가 세상을 그냥 보이는 그대로만보고 있으면 우리는 아직 빛을 못 본 것이고 아직 어둠인 것이다.

 

빛이란 말은 따라서 하나님과 같은 말씀, 하나님과 같은 생명을 가졌다. 그 말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빛인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그 빛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빛을 안다는 것은 나를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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