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 시험의 정체
사람이 사탄이라면 마태복음 4장의 광야시험에 나오는 사탄의 정체는 무엇일까?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말)이 사탄이다. 광야의 시험은 결국 말씀에 대한 시험이었다. 말씀에 대한 대적을 그린 것이 광야 시험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말씀으로 대적하는 영(말)을 이겼다. 먼저 누가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넣으셨는가? 마가에 의하면 성령에 의하여 광야로 몰아가셨다(막1:13). 그렇다면 누가 시험으로 몰아가신 것인가? 하나님이다. 그런데 진리(영/말)로 비진리를 이기자 어떻게 되는가? 천사들이 수종 든다. 갑자기 사탄이 천사로 바뀐다. 말씀의 시험을 이렇게 그린 것이다.
우리에게도 똑같은 말씀의 시험이 온다. 우리에게는 성경이란 것이 주어졌다. 우리가 그 진리의 말씀을 제대로 깨달으면 성경은 변호사(파라클레토스)가 되지만, 우리의 본질인 선과 악의 지식으로 알면 성경은 우리의 고소자(사타나스:사탄)가 된다. 성경으로 구원받을 수 있고, 성경으로 멸망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의 여하에 따라 성경은 사탄일 수도 있고 천사가 부는 나팔 소리도 되는 것이다. 우리를 감옥에 쳐넣은 검사(고소자/사탄)이기도하고, 우리를 돕는 변호사(파라클레토스/성령)이기도 하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자신이 사탄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눈치채지 못한다.
같은 표현을 계시록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계16: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계16:14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세 더러운 영이 어디에서 오는가하면, 용의 ‘입’, 짐승의‘입’,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다. 즉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귀신의 영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고 하는 더러운 비진리의 말을 귀신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비진리의 말을 하는 ‘사람’이 귀신인 것이다. 그래서 4복음서에는 ‘귀신’ 쫓 는장면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바로 이 비진리의 말을 몰아내는 일부터 시작된다. 그것이 내 안에 있는 일곱 귀신이요, 군대귀신이다.
▣군대귀신
그것을 마가복음5장에서는 이천 마리 넘는 군대귀신이 등장한다.
[막 5: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이름은 말씀이라는 뜻과 같다. 이는 곧 네가 가진 말씀이 무엇이냐? 이렇게 묻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 더러운 말을 가진 자가 자신은 군대라고 한다. 이러한 군대 귀신이 바다에 빠지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군대 귀신이 바다에 빠지는 것은 바로의 군대가 홍해에 빠지는 것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전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그래서 모세와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모세안으로 들어가서 세례를 받았다는 말이다. 모세 안으로, 모세를 위하여, 모세를 목적으로, 세례를 받았다. 에이스라는 것은 어디~어디로 들어갈 때 쓴다. 그들이 모세안에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그들을 품고, 즉 모세와 하나 되어, 모세와 함께 죽고 모세와 함께 부활한 것이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히11:29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이스라엘은 애굽을 섬기기 원했다. 돌아가길 원했다. 사실 그들의 믿음은 보잘 것 없었다. 그런데 “믿음으로…” 라는 표현을 썼다. 무슨 믿음인가? 그들의 믿음인가? 아니면 모세인가? 모세의 믿음이다. 그들을 모세가 품어 홍해를 건넌 것이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었다. 지팡이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가 그리스도를 들어! 그리스도의 들림이다. 그리스도의 들림을 통하여 바다가 갈라졌다.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그리스도가 품어 바다를 건넌 것이다. 그리스도의 바다 건넘이다.
이때는 곧 모세에 속하여 세례를 받았을 때이다. 따라서 유리바다 찬양은 세례 후 부르는 찬양이다. 15장은 바로의 군대를 바다에 잠긴 것에 대한 노래이다. 홍해를 건너는 사건은 군대귀신이 바다에 빠지는 것과 같다고 했다. 홍해는 붉은 바다라는 뜻이다. 피바다이다. 죽음의 바다이다.
물에 빠져 죽는 것이 세례이다. 누가? 바로의 군대가 말이다. 바로를 섬기는 무리들이 바로의 군대이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홍해 바다로 들어가서 죽은 것이다. 그것을 마가복음에서는 군대 귀신으로 그린 것이다.
그 더러운 귀신이 이천마리가 되는 돼지에 들어간다. 무슨 말인가? 그 사람 안에 그만큼 많은 더러운 영(말)이 있었다는 것을 예수께서 시각적(사건)으로 보여준 것이다. 사건은 의미를 담고 있다. 사건 속에 의미를 보아야 겠다. 비진리가 물에 빠져 죽는 것이다. 땅에서 바다로 몰아내신다.
이천 마리 돼지는 무엇을 뜻하는가? 진주를 개나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은 더러운 말이다. 그러므로 돼지에게 허락하신다. 그 돼지 떼는 우상숭배자들 곧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다. 비진리를 땅에서 빼내어 바다로 몰아버리는 것이다. 즉, 땅은 성전을 상징한다. 성전을 깨끗케 하는 장면이다. 결국성전은 우리이다. 성전이 깨끗해지는 장면이다. 비진리의 성전을 바다에 내던지는 장면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6,개정]
뽕나무가 아니라 무화과나무이다. 무화과나무는 씨 없는 성전을 상징한다. 즉 그리스도 없는 성전은 바다에 던져버린다는 말이다. 우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그리스도의 믿음)만 있다면 이러한 옛 성전을 바다에 던져버릴 수 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해 진다. “정신이 온전하여”(막5:15)라고 번역되었는데 원어에 보다 가깝게 번역하면 <건전한 마음이 되었다>이다.
즉, 귀신과 마음이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더러운 말을 담으면 귀신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깨끗한 말씀을 가지면 건전한 마음이 된다. 그것이 성령 충만이다. 건전한 마음이 되기 전에는 더러운 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겉옷을 입는다. 성경에서 속옷은 율법을 뜻하고, 겉옷은 진리를 뜻한다. 이제 진리로 옷입은 것이다.
사람이 곧 성전이다. 그런데 이 성전 안에 더러운 말을 담을 수도 있고 깨끗한 말을 담을 수도 있다. 더러운 말을 담으면 악령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깨끗한 말을 담고 있으면 성령이 충만한 것이다. 성령이 없는 자에게는 이천개가 넘는 더러운 말과 사상, 가치관이 혼재할 수 있다. 그로인해 우리가 우리의 마음이 더러워질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귀신들렸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귀신을 내쫓아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수많은 비진리의 말을 바다로 몰아버려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준 귀신을 제어할 엑쑤시아(권세)이다.
▣사탄을 어떻게 결박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 사탄을 결박해야 되지 않겠는가? 어떻게 결박할 수 있을까? 강한 자를 결박하려면 더 강한 자가 와야 한다. 더 강한 자가 누구인가? 바로 성령이다.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daimovnion)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하나님 나라는 귀신이 쫓겨나야만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말씀의 섬김이다. 말씀의 섬김이 오려면 비진리의 영이 없어져야만 한다. 우리도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 그 귀신은 다른 것이 아닌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영,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더러운 비진리의 말이다. 우리 안에는 온갖 더러운 말들이 있다.
그 장면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계 20: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계 20: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계 20:3]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이다. 영은 말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가지고 있는 내가 사탄이다. 내가 사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 때 무한한 책임을 느끼게 된다.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사탄이 서로 싸운다고 생각하면 분열된 세상이다. 이렇게 알면 하늘에는 두 주인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 두 주인이 있을 수 없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둘로 분리된 세상에 모노게네스로 오셨다. 독생자로 번역된 이 모노게네스(모노+게네스=모노:하나+기노스코마이:안다)는 하나 만을 안다, 하나를 가진 자라는 뜻이다. 선/악으로 이분화된 세상을 하나로 통일하러 오셨다. 사탄의 허리를 꺾으셨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질 때 모노게네스, 즉 하나를 가질 때, 진리를 하나로 알 때 사탄이 없어진다. 하나의 하늘이 된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과 사탄은 더 이상 싸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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