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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설교문

창세기 총론

by 다바르아마르 2020. 5. 12.

창세기 : 진리의 씨가 뿌려진 모판

창세기는 성경 전체 이야기가 진리의 씨로 뿌려진 모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원형이고 축소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 전체 이야기를 말하는 창세기는 크게 두 단락으로 복음의 진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장부터 25장까지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복음을 설명하고, 25장부터 50장까지 이삭의 이야기를 통해서 복음의 진리를 말합니다.

 

: 아브라함 / : 이삭

아브라함과 이삭을 비교하자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내 밖의 이야기이고, 이삭의 이야기는 내 안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구약의 이야기라면, 이삭의 이야기는 신약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내 밖의 영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이삭의 이야기는 내 안의 영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육신의 이야기이고, 이삭은 마음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내 밖에서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라면 이삭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100으로 완성되는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11: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출발: 갈대아인의 우르 

복음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은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출발합니다. 갈대아인의 우르는 우상을 섬기는 곳이고, 세상의 영을 상징한다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의 영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가는 이야기가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25:7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8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9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10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 11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아브라함의 죽어 이삭이 됨

창세기25장에는 아브라함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죽음은 하나님을 밖으로 믿는 것의 죽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죽고 난 후에 하나님은 곧바로 이삭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밖으로 믿었던 것이 죽자 안에서 생명이 복으로 임한 것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100배의 소득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26: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100세에 낳아 100이 완성됨

아브라함은 75세에 믿고, 이삭을 100세에 낳아 이삭을 통해서 100을 이루고 75년을 더 살다 175세에 죽습니다. 이삭은 날 때부터 100배의 소득을 얻은 인생이었습니다. 이삭의 이름은 웃음, 기쁨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씨를 받아 누리를 성도의 내적 기쁨을 이삭이 상징합니다. 마음의 기쁨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밖에서부터 믿었던 하나님의 씨의 내적 열매입니다. 그래서 그가 100세에 이삭을 낳아 이삭이 100배의 곡식의 열매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삭의 완성된 100을 설명하는 사람이 바로 야곱입니다. 이삭은 완성된 구원이라면, 야곱은 그 완성을 향가 걸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묵시 속에서 완성된 이삭의 온전이 역사 속에서 야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창세기 27장부터 36장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완성하는 요셉 : 양식과 향

이후 요셉의 이야기로 창세기는 끝이 납니다. 요셉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완성한 자입니다. 요셉은 온 세상의 양식을 관장하는 자의 위치에 있게 됩니다. 이 세상의 양식은 오직 하나님만이 관장합니다. 하늘 곳간은 하나님이 주인이고 하나님만이 주실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불가항력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제한적으로, 완전하게) 그 하나님 자리에 요셉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양식을 관장하는 총리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가 성령을 보내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양식을 관장하는 요셉

41:55 애굽 온 땅이 굶주리매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하는지라 바로가 애굽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 하니라 56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 57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는 요셉

50:1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2 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3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양식을 가진 자의 기도

그래서 창세기 50장에 향재료를 가지고 그의 아버지인 야곱을 장사해 주는 것입니다. 향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계시록에서는 성도의 기도라고 하였습니다. 양식을 가지고 있는 그가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의 향기를 낸다는 것은 밖에서 들어온 말씀이 깨닫게 되어 안으로 들어와 생명이 되어 밖으로 나가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깨달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기도를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도는 우리의 육체를 위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것을 하나님이 기도를 통해서 주시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입니다. 기도는 요셉처럼 오직 양식을 그 마음에 가지고 있는 자에게서만 나오는 향기입니다.(그래서 어떤 자들에겐 사망의 향기가 되고, 어떤 자들에겐 생명의 향기가 됩니다.)

 

양식 맡은 자 : 중보자

이러한 기도자를 우리를 중보자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중보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님뿐이 없지만, 우리가 그 예수의 양식을 맡으면 예수님과 같이 중보의 일을 하게 됩니다. 말씀을 받지 못한 이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보입니다. 그래서 이 진리의 양식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 힘들고 지치는 것입니다. 내가 먹은 이 양식을 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과 친구는 먹지 못하고 입만 다시다가 내 뱉을까?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40일이 걸림

요셉이 아버지에게 향재료를 넣는데 40일이 걸렸습니다. 40으로 주어진 우리 인생 전체가 옛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향을 올려 드리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40일이라는 인생말씀이 인생기도로 향기 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40이라는 인생을 통해서 우려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지식으로 받으면 입가에만 머물다 뱉어지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오직 인생으로 받아야 내 안에 들어온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만이 향기로운 기도를 할 수 있고 이 세상을 향하여 중보자가 되는 것입니다.

 

밖에서부터 들어온 진리의 말씀이 땅 끝까지 이름

이렇게 성경의 이야기는 밖에서부터 시작하여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밖의 광야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신약의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안의 광야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광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야 광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이 내 안의 광야에서 벗어나는 내용을 설명한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말씀이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우주의 땅 끝은 나의 나됨이 있는 그곳입니다. 내 의로 강력하게 뭉쳐 있는 그곳이 나의 땅 끝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곳으로 들어와 내 속의 씨가 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 밖에만 있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흘러들어와 기도로 향기 나게 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씨를 뿌려 마음에 담음

이렇게 말씀을 양식으로 마음에 가지고 있고, 기도의 향기로 올리는 자는 그 안에 하나님의 씨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씨 뿌림의 이야기이고, 씨 담음의 이야기입니다. 씨자체도 중요하지만 씨를 담는 그릇도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씨를 담는 그릇을 교회라고 합니다. 계시록에 가면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사실 계시록은 이렇게 진리의 씨를 담은 교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일곱 교회는 완전한 교회이고, 언약을 담은 교회이며, 씨를 담은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교회란 완전한 씨를 담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씨를 담은 교회는 여자입니다. 하나님은 남자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남편입니다. 그리스도가 성경전체의 비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씨를 받은 자만 마음의 실상이 이루어지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희미하고 어두운 것이 거두어지고 선명함과 밝음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씨가 마음의 실상으로 이루어지는 지게 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절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20:15 누구든지 생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게네시스 비블로스/생명의 책)라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은 구약의 자손입니다. 우리 밖에서 들어오는 말씀과 그 역사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실상과 구원의 실재를 말하는 것입니다.(인생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씨를 받은 여자이고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의미입니다.

 

유다와 다말 : 씨의 이야기

창세기의 전체 속에 이것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38장이 이 씨의 비밀을 말하는 것입니다. 38장은 유다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내용 문맥상 유다의 이야기가 나오면 안 됩니다. 35장에 야곱과 이스마엘이 이삭을 장사합니다. 36장엔 이스마엘의 후손이 나오고 37장엔 요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38장에 유다와 다말이야기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씨와 복음의 이야기를 알면 유다 이야기가 갑자기 나온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37장의 유다의 씨 이야기가 바로 38장부터 시작되는 요셉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씨를 가진자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씨의 비밀 : , , 지팡이

38장은 씨의 비밀을 말하고 있는데, 3가지로 비밀을 말하고 있습니다. , , 지팡이입니다. 인은 도장입니다. 성령의 인침, 소유권을 의미하고, 끈은 진리로 우리를 연결하고 하나 되게 하는 띠를 의미하는 것으로 씨로 말미암아 그 생명과 연합되고 하나 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지팡이는 말씀의 가르침과 인도하심을 의미합니다. 모두 씨를 가지고 있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다의 씨, 즉 그리스도의 씨의 비밀입니다. 그리스도의 씨를 받은 여자로서의 교회가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은 희생 제물로 자기를 정당화 할 수 있는 염소가 아니라, 이러한 세 가지 담보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이렇게 하나님의 씨를 받은 자로서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씨를 가진 자의 삶

창38장에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는 그림이 나옵니다. 이 씨를 받은 자는 어떻게 된다는 것이냐면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다른 말로 애굽으로 복음을 전하러 간다는 것입니다. 팔려가는 것이 아니라 심부름 가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가서 이 씨가 필요한 자에게 건네주는 것입니다. 그 그림이 보디말의 아내를 통해서 설명됩니다.

 

39:7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8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10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11 그러할 때에 요셉이 그의 일을 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 12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13 그 여인이 요셉이 그의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14 그 여인의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15 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16 그의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복음의 겉만 찾는 세상

요셉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씨를 알려주기 위해서 애굽으로 갔습니다. 요셉은 그 씨를 겉옷으로 설명합니다. 씨가 필요한 보디말의 아내는 요셉에게 동침하자고 합니다. 씨가 필요한데 복음의 씨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씨가 필요한 것입니다. 억지로 동침하고자 하자 그의 겉옷을 버려두고 나왔습니다. 세상은 복음의 겉만 받는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율법만 받습니다. 하나님의 껍데기만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자기 욕망을 확장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 씨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겉에만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세상 적으로만 이용하는 자들, 우상숭배 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에게 비밀의 씨를 겉옷으로만 주는 것입니다. 속뜻을 모르니까 그냥 겉만 주고 그거 먹고 겉만 포장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으로서의 보디발의 아내들은 하나님을 율법으로만 취하여 열심히 우상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자기 의를 챙기고, 자기를 정당화할 희생제사만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예레미야가 탄핵한 유다의 죄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겉에만 머무는 자들입니다. 양식을 입으로만 먹다가 뱉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도둑질 하는 자들

성경의 내용을 하나님의 지식으로 읽으면(속의 이야기) 영혼을 살게 하는 양식이 됩니다. 그러나 세상 지식으로 읽으면, 쉽게 말해 겉의 이야기로만 읽으면, 하나님의 양식이 아니라, 내 양식이 됩니다. 내 의를 살게 하고, 나를 정당화하는 자아 숭배의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거 먹으면 자랑하는 자가 됩니다. 그런 자를 거짓 말 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도둑질 하는 자가 됩니다. 그것을 탐욕이라고 하였습니다. 십일조를 도둑질하였다는 것은 십의 하나, 십을 완성하는 그리스도의 그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기를 정당화하는 육의 양식으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의 일을 도둑질하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미련한 자와 지혜로운 자

그래서 자기 의와 자기 지식을 버리지 못하고서는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지식을 생명으로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의 미련한 자를 통해서 똑똑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겉의 말씀으로만 열심히 추구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속으로 찾는 지혜로운 자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머리를 잘라야

바울이 겐그레아 지방에서 삭발을 합니다. 그것은 곧 그의 세상 지식을 잘랐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지 자신이 머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머리에서 나는 머리카락은 그리스도의 지식이지만, 내 머리에서 나는 머리카락은 세상 지식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별된 나실인은 머리를 자르지 않습니다. 그의 머리카락은 하나님의 지식이요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머리털은 우리의 지식입니다. 문제는 그 지식이 그리스도의 머리에서 나온 지식이냐? 내 머리에서 나온 지식이냐의 문제입니다.

 

성경(聖經)이 전서(全書)로 펼쳐짐

여자는 성경을 배우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씨로 받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여자는 머리가 길어야 합니다. 세상적으로 긴 것이 아니라 하늘 적으로 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밖에서 일어난 겉옷의 이야기로 읽는 사람은 자기 지식만 자랑하는 음란한 여자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생명으로 받는 자는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가 되어서 그 씨의 비밀을 나타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이렇게 진리의 씨가 뿌려진 인생들의 원형이며 모판입니다. 이러한 성경(聖經) 즉 신의 문자가 전서(全書)로 즉 온전하게 기록되어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인생 속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종교를 그리스도교라고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