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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새벽기도 말씀

성령이 사역 = 말씀 사역

by 다바르아마르 2020. 6. 4.

엡1: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구원

삼위 하나님의 사역 성도의 구원은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사역 즉 성부 하나님의 계획과 성자 예수님의 실행과 성령 하나님의 적용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 은혜로 얻게 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은 삼위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신뢰이며 의존입니다. 이렇게 성부 하나님께서 영원 속에서 계획하신 우리의 구속을, 성자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순종하심으로 실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역사와 경험 속에서 계획하시고 실행하신 그 구원을 적용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실행하시고 적용하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기 때문에 조직신학에서 구원론을 성령론 이라고도 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구원의 적용사역 

성령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적용사역은, 진리의 말씀 구원을 복음을 듣게 하고, 믿게 하고,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시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인치십니까? 진리의 말씀과 구원의 복음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하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하나님은 바로 이 성경을 듣게 하고, 그 내용을 믿게 하고, 마음에 인치심으로 하나님의 원대한 구속의 역사를 우리의 마음 속에, 우리의 역사 속에서 이루십니다. 창세전 언약, 그 베레쉬트의 언약을 이루시니, 우리의 머리를 잘라 예수의 머리와 연합함으로 예수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말씀 사역의 중요성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진리를 선포하는 교회의 말씀 사역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데 절대적인 사역입니다. 특히 기복적 성공주의, 율법적 교권주의, 도덕적 성화주의, 감정적 신비주의가 교회의 대세를 이루고 있는 이 시대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이런 잘못된 이교화된 기독교는 계시된 성경 보다, 자신들의 교권과 전통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들은 인간의 알량한 자존심을 치켜세우기 위해 감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난도질합니다.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보편 인간의 아담적 욕망이 해체되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가야 하는데, 인간들은 자기의 의를 정당화하고 확장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해체합니다. 자신의 아담적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들먹거리고,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하나님을 이용하여 종교적인 폭력을 행사합니다. 수많은 영혼들이 지금도 종교적인 학대와 방치 속에서 자기 욕망의 지옥에 갇혀 있습니다.(어린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가 자식이 하고 싶은 대로, 자기 본성이 욕망하는 대로 다 하도록 그대로 두면 아이는 어떻게 됩니까? 짐승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교인들이 이렇게 영적인 학대를 당하고 있습니다.)

 

들은 성경을 통해서 자기 의를 챙기고, 자기 욕망을 정당화 합니다. 이들은 인간의 머리를 잘라 예수의 몸에 함몰하는 참된 기독교의 돌연변이입니다. 그들은 이 지옥에서 안주하고 성공하고 번영하고 싶은 아담군상들의 욕망을 잘 이용하는 탁월한 영업사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인 디모데에게 이런 권면을 한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세 가지 원리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하라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경책함(엘렝코)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목사는 어떻게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까? 오래 참으면서,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해야 합니다. 경책하다는 드러내다, 폭로하다의 "엘렝코"입니다. 이 단어가 사용된 곳이 요16:8절입니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경계함(에피티마오) 

경계하다는 비난하다, 꾸짖다의 "에피티마오"(ejpitimavw) 이 에피티마오를 예수님이 이렇게 사용하셨습니다.

마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마 17: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권함(파라칼레오) 

세 번째 단어인 권하다는 "파라칼레오"(parakalevw)입니다. 파라는 전치사로 ~곁에 이고, 칼레오는 부르다, 간청하다의 뜻입니다. 사용된 곳이 마5:4절입니다.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성령의 위로 

말씀을 가르치는 원리가 경책하다(엘렝코), 경계하다(에피티마오), 권하다(파라칼레오)입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들었을 때 경험되는 내용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경책함으로 우리의 죄와 악이 폭로됩니다. 그 죄의 폭로는 죄의 근원인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하는 우리의 악마 성을 꾸짖습니다. 그 때 우리 안에서 사탄의 본질인 거짓된 말, 가짜 말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경책과 거짓이 사라짐으로 진정한 파라칼레오, 성령의 위로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자를 피했는데 호랑이를 만나는 사람들 

요즘 대부분의 교회가 인본주의적인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도덕과 윤리적 가르침, 내적치유나, 인간관계 중심의 교회생활, 엔터테이먼트적 교회운영 등을 비난하면서 설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이해하는 설교의 유일한 목표는 죄를 책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좌우에 날선 검보다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가 쪼개져야 한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씀과 설교의 유일한 목적이 아닙니다. 옛 자아와 아담의 욕망을 깨뜨려서 새 자아,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자로 회복하는 것이 말씀이 지향하는 목적입니다. 우리의 죄와 악이 폭로당하고, 말씀으로 해체되고 무너지기만 한다면 그것은 수술을 하고 암 덩어리를 꺼내고 치료를 했는데, 마지막 봉합을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차라리 수술을 하지 않았으면 더 낳을 뻔 했다고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말씀 사역

그렇지만 교회의 역사는 언제나 인본주의적 자아 확장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 적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언제나 계시된 말씀을 잘못 가르친 거짓 선지자, 거짓 교사가 있었습니다.

 

렘23:1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이 말한 묵시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17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미3:5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 이에 물 것이 있으면(먹을 것을 주는 자들에게)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6 그러므로 너희가 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어둠을 만나리니 점 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7 선견자가 부끄러워하며 술객이 수치를 당하여 다 입술을 가릴 것은 하나님이 응답하지 아니하심이거니와 8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루아흐/프뉴마)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요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ejlevgcw(1651, 엘렝코) 드러내다, 폭로하다.)

그 밥에 그 나물 

거짓 선지자, 거짓 교사는 누구의 거울입니까? 거짓 성도의 거울입니다.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듯이, 거짓 성도가 대세를 이루니까 거짓 교사가 판을 치는 것입니다. 서로 윈윈 하는 것이죠. 성경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더라도 항상 그랬습니다. 언제나 거짓 선지자가 대세를 이루고, 진리를 전하는 참된 선지자는 소수였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언제나 많은 백성들에게 환호를 받았습니다. 기도를 조금 더 하면 너의 문제는 해결이 되, 하나님 믿는데 헌신하고 봉사해야지 너의 인생이 잘 풀려, 헌금을 조금 더 내봐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실 거야.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해야지 자식이 잘된다고 너스레를 떱니다.

 

후회와 불안을 먹고 사는 종교 

그들은 인간의 심리를 너무도 잘 압니다. 과거의 후회를 잘 이용하기도 하고, 미래의 불안을 영업 전략으로 사용합니다. 왜 종교라는 것이 망하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게 하거나, 오지 않는 미래를 불안해합니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종교입니다(또는 과학). 여러분 천국이라는 것도 지옥에 가기 싫기 때문에 천국에 가고 싶으면 그 사람이 간 천국이 지옥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곳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된 복음은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을 복음의 진리로 극복합니다. 과거의 상처는 지금 하나님 사랑을 경험하게 하는 과정이요 수단이었음을 인정하게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용서입니다. 불안한 미래는 하나님의 주권 앞에 나의 존재와 주체성을 내어 맡기는 믿음의 시험장이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여기서 복음의 은혜를 날마다 경험해야 합니다. 배우고 익혀서 여러분 안으로 담지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에서 나와 현재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이 전해지는 원리

여러분 거짓 선지자, 거짓 교사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은 절이나, 나이트클럽에 있지 않습니다. 거짓 신자는 교회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자아 주체성의 머리가 잘려 예수의 몸에 함몰되어 가는 복음의 진리를 전하지 않는 목사는 거짓 목사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도록 요구하고 독려하고 가르치지 않는 목사는 양의 탈을 쓴 이리이고 늑대입니다.

 

마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prosevcw (4337, 프로세코) 주의하다, 전념하다)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거짓 선지자와 참된 선지자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거짓 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고 양들에게 가지만 실상은 이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내는 참된 선지는 이리 속으로 가는 양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이 이리의 세상에 양으로 오셔서 그들의 밥이 되셨듯이, 참된 선지자도 인간들 속에 있는 이리적 욕망을 양으로 잡아먹힘으로 폭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 원리인 뱀의 지혜입니다.

 

구원을 경험할 때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고 있던 사람이 구원을 경험할 때 그가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복음의 은혜를 전하는 진리의 교사를 가장 먼저 만납니다. 여러분 중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깨닫는 일이 없이 구원을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착한 것인지, 순수한 것인지, 아니면 생각이 없는 것인지 이렇게 꾸준히 예배드리고, 적당히 봉사하고, 헌금내고 자기 나름대로 종교생활 하듯이 교회 생활을 하면 구원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교회를 다닙니다. 그리고 목사들은 그것을 잘 이용하지요.

 

우리 대부분은 중앙교회에 오시기 전에 각자 나름대로 성실하게 종교생활을 하셨을 것입니다. 성가대나 교사나 구역장으로, 봉사하고 매년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 단기선교도 가고, 일부러 휴가를 내서 수련회도 가며 각자 나름대로 기독교인이라고 종교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진리를 전하는 교사로서의 목사가 없었습니다. 그냥 담임목사님은 있었지요. 여러분이 결혼하면 주례해주고, 혹시 죽으면 장례예배를 진행해줄 목사는 있었지요. 혹은 예배에 빠지면 전화하며 관리해주는 부교역자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진리를 생명의 씨로 전할 아비와 같은 목사는 없었습니다.

 

목사와 성도를 통해

그러니 말씀을 가르치는 교회의 말씀사역이 얼마나 중요하며, 그 말씀을 여러분 마음에 담는 것은 또한 얼마나 중요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말씀을 자신의 존재와 역사 안으로 담아낸 진리의 담지자들, 성도를 세워가는 기관입니다. 그래야지 세상에 있는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모릅니다.) 말하는 자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와 그 말씀을 마음으로 담는 성도를 통해서 교회는 이 비진리의 세상에 진리를 증거하는 신적인 기관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성령 하나님께서 계시된 성경을 통해서,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를 사용함으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위기와 그 대안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큰 위기와 문제는 무엇입니까?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는 있고, 교회 프로그램을 운용하는 전문적인 부교역자도 있고, 종교적인 제의를 수행하는 종교인들은 있는데, 성경을 진리로 전하는 교사가 거의 없습니다. 계시된 성경 말씀을 복음으로, 은혜로, 십자가로, 하나님 나라로 설명하는 성경교사가 거의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고 위기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 중앙교회가 얼마나 열심히 말씀을 바르고 정확하게 가르쳐야 하겠으며 또 그 말씀을 잘 배워 마음에 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은 말씀을 잘 배워서 우리 마음의 창고에 잘 담아 이 기근의 시대에 양식이 없어 푸토코스(가난)한 자에게 하늘 양식으로 잘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구제, 진짜 기도, 진짜 금식입니다. 바로 그 일을 약속의 성령이 지금 우리 역사 속에서 중앙교회 안에서 행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