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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새벽기도 말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머리로 세워지는 교회 (골1:15-18/히브리어 속에 숨겨진 복음)

by 다바르아마르 2020. 5. 23.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토라 (hr;/T) :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을 나타냄

토라는 헤브리어 타브”(T), “바브”(/), “레쉬”(r), “헤이(h)” 라는 알파벳으로 조합된 단어입니다. “타브 십자가”, “바브 ”, “레쉬 사람”, “헤이 나타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토라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의미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을 나타내다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토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토라는 결국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24: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5:46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토라)하였음이라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성경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합니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할까요?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만을 가리키고, 증거하고 결론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앎으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바로 나 개인의 존재와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목적으로 해야 됨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이 시간과 공간으로 움직이고 있는 온 우주의 역사도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을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성과 필연성 

이렇게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필연성과 절대성을 가리킨다면,  성경을 통해서 이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는 우리의 존재와 인생과 역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읽어내고, 예수 그리스도를 최종적, 궁극적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인간의 존재와 역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예수 그리스도도 보지 못하게 되고, 이 역사의 궁극적 결론인 예수 그리스도도 모르게 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서 소외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심판이고, 저주이며, 지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함몰되는 역사 

성도는 자신의 존재, , 인생, 역사, 관계, 목적, 비전, , 하고 싶은 것, 그 모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로 함몰된다는 것을 압니다. 무엇을 통해서요? 성경을 통해서요? 그러니까 성경을 통해서 예수를 바르게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은 기독교를 오해하고 왜곡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내 존재가 삭제 당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내 인생과 역사를 통해 오롯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인류의 역사와 우리의 개별적 존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로 함몰되어 그분께 차압당하게 됩니다. 역사의 종말의 때에(개인적인 종말) 그리스도께로 함몰되지 않는 자들은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은 자명합니다.

 

교회의 위기

오늘날의 기독교의 위기를 교회의 위기라고 합니다. 불과   년 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 들어왔는데, 이제는 물밀듯이 다시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교회의 위기는 이러한 물리적인 위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구원론 교회론에 있습니다. 현대교회가 주장하고 있는 보편적인 구원론은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고, 봉사하여서 상급 받자입니다. 복음주의 운동이 교회에 성경공부 확산이라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어도, 본질적인 복음의 내용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진정한 의미 

천국이나 구원을 종교적인 이상향이나, 심리적 판타지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나중에 최후의 심판을 받지 않게 된다는 것에만 머물러 있으시면 안 됩니. 조직신학에서 말하는 구원은 인간의 죄와 악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회심해야 한다고 합니다. 단순히 예수 믿어서 더 좋은 곳으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인간의 보편 욕망의 죽음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죽음 이후에 더 좋은 곳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에만 머물러 있으시면 안 됩니. 성도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보편적 욕망의 죽음입니다.  보편적 욕망을 다른 말로, 선악 판단의 주체로서의 나, 이 세상에서 왕 되고, 신 되고자 하는 나, 절대적 자유의지를 가지고 내가 (실제로 가지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주체로 살고 싶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나가 죽는 것이 보편적 욕망의 죽음입니다. 성경은 그 보편 자아의 죽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옛 자아의 죽음이 곧 구원이라고 합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무엇으로 산다고 합니까? 그리스도로 산다고 합니다. 그러면 성도가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대상을 믿는다는 것은 이미 나라는 존재에 대한 삭제가 전제되어야지만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믿음주의자들이 말하는 심리적, 지적 동의 수준의 믿음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라, 미신적 맹신적 자기 암시입니다.(긍정의 힘, 잘되는 나) 왜냐하면 이런 믿음은 믿음의 대상에 대한 절대 신뢰 다시 말해서 선악 판단의 주체로서의 나의 욕망의 죽음이 전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 구원의 가능성 

이러한 구원의 본질에 대한 논리는 성경적인 근거를 대기 이전에 심리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도 설명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아의 욕망을 충족하고 확장하는 것만을 추구하며 삽니다(그것이 뇌의 본능적 기능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뇌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싫어하는 것을 쳐내는 기능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아 바깥에 있는 것을 자신 안으로 끌어 당겨 자신의 자아를 확장하는데 사용합니다.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재화(돈)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돈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관계, 지식, 종교등 다양한 것으로 자신의 자아의 욕망을 충족하는데 사용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용하는 자들 

오늘날 개신교 진영, 기복주의, 성공주의, 신비주의, 율법주의는 논할 필요도 없고, 복음을 알고 있다고 자평하는 개혁주의나,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신의 자아의 욕망을 부추기고 확장하는데 이용하고 있습니다.

 

 1: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 하는 자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서 "저 예수님 믿지 않아요" 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여 그리스도로 우리 안에 내주합니다. 그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 안에서 옛 사람을 해체하는 그 일을 하시지 않고, 인간의 욕망을 확장하는데 도움을 주시는 분 정도로 이해하는 자들이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 예수가 그리스도로 내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를 모르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고후 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다른 복음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신의 욕망을 확장하는데 사용하는 것은 어떤 주의를 논하기 전에 인간의 본성 자체가 그렇게 세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적 욕망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 옛 자아를 공격하고, 해체하고 허무는 진리의 말씀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인간은 잠깐 받은 말씀을 자신의 자아의 욕망을 지키고 확장하는데 이용하게 됩니다.

 

나의 구원 챙기기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으시죠? 기독교 신앙을 여러분의 종교적인 신념으로 믿고 받아들이고 있지요? 왜 그러합니까? 이 기독교를 통해서 천국이라는 더 좋은 곳으로 가고자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것은 기독교를 이용해서 나의 구원을 챙기자, 고통을 당하지 않는 더 좋은 곳으로 가자라는 욕망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구원이고, 나의 천국입니다. 여러분, 우리 종교의 구원은 내세 피안적인 것도 아니고, 현세의 차안적인 것이 아닙니다. 전자는 신비주의로,(염세주의, 영지주의/내세 중심의 구원론) 후자는 성공주의로(현세 중심의 구원론) 나타날 뿐 둘 다 똑 같이 자신의 구원을 챙기자는 것입니다.

 

구원의 본질 그러면 기독교의 진짜 구원은 무엇일까요? 욕망하는 자아의 죽음, 선악과 먹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며 살고자하는 인간의 보편적 욕망의 죽음이 곧 구원이고 천국이며,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고통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욕망하는 자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범신론인 불교는 이 욕망하는 나를 넘어서야지만(해탈) 구원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욕망하는 나에서 욕망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자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관은 논리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재로는 불가능합니다.

 

타력 구원의 필요성 

기독교는 구원의 주체를 욕망 하는 나 안에서 찾지 않고 밖에서부터 시작됨을 선포합니다. 소위 말해 자력 구원이 아니라, 타력 구원입니다. 인간이 구원 받으려면 선악과 먹은 인간의 자아가 죽어야 되는데 그것은 인간 스스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서가 아니라 내 밖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진리의 영으로 당신의 백성 안으로 내주하십니다. 내 마음과 역사 밖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의 영으로 내 안에 들어와 그 십자가의 죽음을 실현해 가는 것이 우리의 역사입니다. 그 성령의 내주는 곧 그리스도의 영의 내주이고, 말씀의 내주입니다. 신자 안에 들어온 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영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선악과 먹어 선악 판단의 자리, 자신의 자아의 욕망을 확장하고자 하는 신을 흉내 내는 그 나를 공격하고 해체하는 작업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되고 완성되는 구원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사는 창세기 1 1절부터 이미 예고되었습니다. 성경의 첫 단어, 첫 문장부터 예수님을 증거하고 모든 피조물은 이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서 창조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고, 완성된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창세기 1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는 창조하시니라

베레쉬트 

한글 성경에 태초에라고 번역된 부분이 베레쉬트입니다. 이 부분을 분석을 하면 베이트“(B) ”로쉬“(yvar) ”타우’(t)입니다. “베이트(B)는 전치사로 ~안 이고, 명사로 집, 성전입니다. “로쉬(yviar)는 머리, 시작, 열매란 뜻입니다. 그리고 타우”(t)는 십자가, 언약, 목표, 마침 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베레쉬트)를 파자를 하면 "그 집 안에(베이트) 머리로 시작하여(로쉬) 완성한다.(타우)"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의 머리를 예수의 머리로 만들어 그 집을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 혹은 재창조의 사역, 종말과 완성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집을 세워 가신다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잘 섬겨, 인간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도움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펼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아담적 욕망을 해체함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 구속의 사역은 타우(t)라는 십자가로 완료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머리를 잘라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심 결국 성경의 역사, 하나님의 구속사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집을 짓기 위해서 당신의 백성의 머리를 자르시고, 그 머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를 붙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머리가 당신의 몸인 교회로 넘겨진 것입니다.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성도는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통해 나타난 역사를 통해 오직 하나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의 주체성으로서 머리가 잘려, 그리스도의 몸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여러분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 받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의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에 의해서 구원 받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가 누구이며, 어떤 사역을 했는지 이 성경을 통해서 알지 못하면,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너무도 막연하고 애매한 명제가 될 뿐입니다.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나의 죽음으로서의 십자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았던 우리의 머리가 그리스도에 의해 잘려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성경의 진술을 내 삶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죽음은 나를 위한, 나를 대신한 죽음이기도 하지만, 곧 나의 죽음입니다. 그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내 머리가 잘려져 예수님의 머리에 연합된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 사실을 역사 속에서 어떻게 체험하지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을 때, 영은 곧 말이니까? 그리스도의 말, 진리를 복음을 들을 때 비로소 시작이 되고, 우리 역사의 종말을 통해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진정한 의미 

이러한 구원론 위에 교회론을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할까요? 교회는 이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치고, 나누고, 흘려주는 일을 해야겠습니다. 어떻게요?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교사 그 말씀에 반응하는 성도를 통해서요. 그래서 교회라는 모임을 만들고, 날을 정하여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배우고 우리 안에 있는 말씀으로 교제하면서, 또 이 말씀을 이 역사 속에 흘려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인간이 모인 지역교회가 필요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가 필요하고, 성도를 돌보는 조직과 행정이 필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