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2: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진리의 생베조각
생베조각, “아그나포스 라코스 에피플레마”는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는, 바느질하지 않는 천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가 자신의 육체를 통해 우리에게 건네주신 진리의 말씀, 영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 새것을 낡은 옷, “팔라이오스 하마티온”에 붙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22절도 같은 말씀이지만 설명을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로 다시 반복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새 포도주와 낡은 부대
22절은 새 포도주와 낡은 부대가 대조가 되고 있습니다. 새 포도주는 “네오스 오이네스입니다. ”네오스“라는 것은 본질적인 새것이라고 했습니다. ”낡은 부대“는 ”팔라이오스 아스코스“입니다. 그러니까 새 포도주는 본질적인 새것을 가리키는 것이고, 낡은 부대는 여전히 율법적인 반복과 오래된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스코스“는 단순히 가죽부대라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이 단어는 ”스큐오스“라는 단어에 왔는데, ”스큐오스“는 그릇, 기명, 기구란 뜻입니다. 성경에서 ”스큐오스“는 그릇으로 많이 번역되었습니다. 그래서 ”팔라이오스 아스코스“가 담고 있는 의미는 오래된 그릇, 율법적 그릇을 의미합니다.
행 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롬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진리의 그릇으로 교회를 부르심
24절에 바울은 이 그릇을 ”우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에서 부대라는 것은 교회에 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은 그릇으로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스큐오스“는 성경에서 성전의 기명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습니다. 성전의 기명은 하나님이 모형과 상징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하늘의 그 진리,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설명하는 비유와 상징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진리, 새것을 담게 되면 우리는 새 그릇이 되는 것이고, 새 부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담겨진 것이 진리가 아니면 우리는 그냥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보배를 담은 질그릇
보배를 담은 질그릇과 그냥 질그릇은 다릅니다.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 깨지면 보배가 드러나지만, 그냥 질그릇은 깨지면 멸망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고린도후서 4:6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6절에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보배(보물)은 무엇입니까? 어두움인 우리 마음에 비치어진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보배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얼굴이 프로소폰입니다. 얼굴이라는 단어가 얼의 모양입니다. 얼은 영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마음에 비춘 그것을 보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보배를 마음에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이 보배를 가진 질그릇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그릇이 ”스큐오스“입니다. 내용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러니까 새 포도주 ”네오스 오이네스“는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본질을 담는 보배에 관한 말씀입니다.
진리를 담을 수 없는 낡은 가죽부대
그러면 낡은 부대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진리와 상관없는 율법의 그릇, 진노의 그릇, 멸망의 그릇을 말하는 것입니다. 낡은 그릇은 그 마음 안에 율법이 헛된 양식으로 담겨져 있어서 새 포도주, 진리가 담길 공간이 없다는 뜻입니다. 못 담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새 포도주는 옛날 것에 담겨져 있는 그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옛 것이 먼저 비워지게 되고, 그렇지 않고, 새 포도주인 진리가 낡은 그릇에 담겨 버리면 새 포도주가 낡은 가죽부대를 산산조각 낸다고 합니다.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라고 할 때 ”터뜨려“가 ”레그뉘미“인데 찢다, 산산조각내다, 가루로 만들다”란 뜻입니다. 새 포도주가 낡은 그릇을 산산조각으로 부수어 버린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율법을 표현할 때 조각난 것, 부스러기, 깨진 것 등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완전히 가루로 부수어진 모래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이렇게 조각조가 깨진 것, 부스러기라고 합니다. 율법은 이렇게 하나님이 진리로 주신 것을 조각조각 부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진노의 그릇으로 멸망당함
그렇게 되면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버리다가 “아폴뤼미”입니다. “아폴뤼미”는 단순히 물건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강력한 의지가 담겨져 있는 “멸망시키다”란 뜻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이냐면, 새 포도주라는 예수라는 올무에 걸려 넘어지는 자, 오히려 그 예수라는 올무에 걸려 멸망에 이르는 자들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율법의 헛된 양식으로 가득 차 있는 이들에게 진리가 가면 그 예수에 의해 그들이 멸망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얼굴에 있는 그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그들은 결굴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낡은 그릇이 진리를 받아낼 수 없기 때문에 그 진리를 모래와 부스러기로 산산이 부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주의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진리를 주면 그것을 율법으로 산산 조각 냅니다. 그런 자들을 성경은 바다의 모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새 포도주 “네오스”는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땅으로 버린다고 합니다.
생명을 담지 못하는 부정한 자들
성경에서 부정하고 생명이 없는 자들의 특징은 피를 땅에 버린다고 합니다. 생명은 피에 있는데, 그 생명인 피를 영의 말씀으로 마음에 담지 못하니까? 땅으로 쏟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피를 땅으로 계속 버리는 질명을 “유출병”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이들을 부정한 자라고 하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주님이 당신의 피를 흘려서 참된 생명을 건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곧 물이고, 물은 성령이고, 성령은 진리입니다. 그것을 흘려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흘려주십니다. 그 생명을 받아먹고 마음으로 담으라고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 그 피를 담지 못하고 이 땅으로 흘려버리면 그것을 멸망이라고 합니다. 그가 부정한 자입니다. 율법에서 월경하는 여자를 부정하다고 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피를 담지 못하고 땅 아래로 쏟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새 그릇이라는 새 마음에 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대로 보면 낡은 그릇은 절대로 진리의 양식을 먹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금식의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매일 공갈빵 같은 속을 채울 수 없는 거짓된 양식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자칼과 네케바
이렇게 복음은 새 그릇에 담겨지는 새 포도주로 설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새 그릇과 새 내용물은 창세기부터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칼”과 “네케바”라는 단어로 설명되었습니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5: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자칼을 담는 네케바
“네케바가 의미하는 것은 내용을 담는 ”그릇“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암컷, 여자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네케바“에는 ”홈, 구멍, 구멍을 뚫다“란 의미도 있습니다. 안에 내용을 담기 위해서 구멍을 뚫습니다. 반지의 홈을 ”네케바“라고 한다면, 홈 안에 들어가는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을 ”자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이아몬드 반지를 생각할 때 반지가 중요합니까? 박혀 있는 다이아몬드가 중요합니까? 자칼이 없는 그릇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네케바“ 없는 자칼은 있을 수 없다고합니다. 이 둘은 상대적으로 무엇이 더 좋고 나쁘다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로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존재를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짝이 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바로 ”자칼“과 ”네케바“가 담고 있는 의미입니다.
네케바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자칼
사실 자칼은 ”네케바“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자칼의 본질은 영이기 때문입니다. 영이라는 개념은 그것을 담는 그릇인 육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영은 담겨진 그릇과 함께 하나가 될 때 그 때 비로소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는 육에 담겨지지 않는 영을 귀신, 혼령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칼과 ”네케바“는 반드시 연합해 하나가 되어야 진짜 생명이 되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과 같은 내용을 설명하는 누가복음5장에서 이 둘이 함께 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눅5: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연합하여 하나, 생명이 됨
여기 “어울리지”가 “쉼포네오”라고 했습니다. “쉼포네오”는 함께 하나의 소리를 내다, 연합하다, 하나가 되다란 뜻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새 포도주와 새 부대, “자칼”과 “네케바”는 반드시 함께 소리를 내어 한다, 연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새 포도주 즉 성령을 양식으로 먹는 자들은 이제 성경과 예수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육체의 눈으로, 겉으로 나타난 것으로, 율법으로 보지 않고, 그 안의 내용과 영으로 보게 됩니다. 이것을 육체로만 판단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후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살아 있는 것이 새것입니다.
산 자들은 새것이 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 즉 옛 것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죽었다가 다시 사진 자, 즉 그리스도, 새 남편을 위하여 살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알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첫 번째 남편, 그리스도, 예수를 육체로 압니다. 겉으로 나타난, 율법으로 보이신 그 “희생제물”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작해야 내 소원과 꿈을 들어주시는 분 정도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자들은 예수를 새 포도주 새 남편으로 알아 진정한 “쉼포네오”, 같은 말, 연합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지 못한 것을 부정한 자, 그렇게 된 자를 정결한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넣어주신 자칼로서 그 피를 담지 못하고 아래로 하혈하니까 부정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눅5: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새로운 피조물
선악과 먹은 사람의 본성은 새것보다 묵은 것을 더 좋아합니다. 자신의 “아”를 지키고, 보존할 수 있는 묵은 것, “팔라이오스”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 “카이노스 크리티스”가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네오스”를 받아서 그 묵은 것, “팔라이오스”를 벗어버리고, “카이노스”의 새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피조물이 된 “카이노스”는 그의 본질이 바뀐 것이 아니라, 그의 신분과 그들에 대한 평가가 바뀐 것이라고 했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적 변화 진리의 변화의 핵심은 그의 본질과 본성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다른 것이 아니라, 묵은 포도주가 담고 있는 그것이 새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이 새 포도주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팔라이오스”입니다. 해 아래 새것은 없습니다. 다 옛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아래 세상을 묵은 것을 통해서 새것을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율법도, 예수도, 성전도, 모두 묵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네오스”가 진리로, 새것으로 보여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 똑 같은 성경인데 어떤 이들에겐 묵은 것이 되고, 어떤 이들에겐 새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새 언약 할 때 새 가 “네오스”가 아니라, “카이노스”입니다.
마26: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면 무엇을 마신다고 합니까?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새것으로 마신다고 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영으로 들어오시면 나와 그리스도는 함께 새것으로 마신다는 것입니다. 이 새것이 “카이노스”입니다. 우리는 이 새것을 성령으로 마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새것을 사람들은 계속 옛 날것으로 마시고 있습니다. 흔히 “성찬식”이라고 할 때 그 성찬은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새 것이 아니라, 율법을 자신들의 형식과 제도로 조금 변형시킨 옛 것입니다. 가톨릭은 성찬을 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까지 합니다. 여전히 옛 것으로 묵은 것으로 “팔라이오스”적으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에서 나는 것은 “피”입니다. 그 피는 담아야 합니다. 진리의 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된 연합으로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새것으로 담는 것을 사도들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 욕심, 욕망
우리는 소욕, 욕심, 욕망 이런 단어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사실 이 단어들은 생리적이고, 본성적인 단어인데, 도덕적이고, 율법적인 개념이 덧붙여지면서 부정적으로 보는 듯합니다. 성경은 이 단어들은 모두 “에피두미아”라로 번역했습니다. “에피두미아”는 율법을 “노미조”한 그 상태에서 흘러나는 희생제사와 관련된 지극히 종교적인 언어입니다.
희생제사적 욕망
그러니까 소욕(에피두미아)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적 욕망이 아니라, 지극히 종교적이고 구약적인 배경의 언어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소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이 율법의 세상을 인간의 자기 애적 본성, 선악의 본성으로 “노미조”하는 것 그것을 소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에피두미아로 행하게 되면 그것이 멸망의 양식이 되는 것이고, 그 “에피두미아”를 금하는 율법을 통해 “에피두미아”를 하지 않게 되면 그것을 금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그릇 안에
우리는 하늘에서 내리는 말씀이라는 양식을 참 양식으로 먹어야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살 수 있는 새것이 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의 말씀은 이 시간과 공간과 인간의 그 제한된 이성 속으로 내려와야 하기 때문에 아래 것이라는 그릇에 담겨 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 사람들의 눈에는 그냥 껍데기와 형식과 반복되는 묵은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그 것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는 진의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신 그 언약의 피는 새 그릇에 담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우리 안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먹어 이 세상에 대하여 금식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새 포도주를 새 그릇에 담으셔서 이미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이 역사를 통해, 우리 안에서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겨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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