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3:25-34)
25. 그들이 거기서 음식을 먹겠다 함을 들었으므로 예물을 정돈하고 요셉이 정오에 오기를 기다리더니
26. 요셉이 집으로 오매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서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니
27.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이르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아직도 생존해 계시느냐
28. 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
29.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30.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31. 얼굴을 씻고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음식을 차리라 하매
32.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차리고 그와 함께 먹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리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
33. 그들이 요셉 앞에 앉되 그들의 나이에 따라 앉히게 되니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
34. 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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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상징적 숫자로 열두 아들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들도 말씀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요.
아들을 상징하는 숫자 열 둘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열 이라는 온전한 수를 반으로 나누면
왼쪽 다섯과 오른쪽 다섯이 되지요.
그리고 왼쪽 다섯을 보이는 쪽 하나로
오른쪽 다섯을 보이지 않는 쪽 하나로
(5+1)+(5+1)=12
다시 말해서
왼쪽 다섯은 보이는 한 부분
오른쪽 다섯은 보이지 않는 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아들을 설명하는 숫자가 왜 이렇게 되는가 하면
완전수 열은 보이는 것 다섯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다섯을 깨닫게 된 상태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의 고백과 같이 다섯마디 깨달은 말을 의미합니다.
다섯 다섯을 설명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다섯과 다섯으로 오셨습니다.
보이는 육체 다섯과
보이지 않는 영 다섯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1:1의 상태를 아들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예외 없이 보이는 것 다섯과 (육체)
보이지 않는 다섯으로 (영)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보이는 한쪽 다섯(육체)을
보이지 않는 한쪽 다섯(영) 안으로 들어가셔서
둘이 하나되어 그리스도 예수가 된 것입니다.
"아들"의 숫자 열 둘은
다섯 다섯의 둘이 (열 둘)
아들(진리 하나)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아들"은 하나의 진리 또는 하나의 영 이라는 뜻을 산출합니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이 말씀과 같이 아들이란
육신 다섯이 영 다섯으로 깨달아졌기 때문에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육신에 속한 생각이 그치고
마음으로 깨달아진 다섯마디 영적인 언어를 하는 자들입니다.
자신이 아직도 육신에 속해 있는지
아니면 영에 속해 있는지 알 수 있는 시금석은
그 입에서 나오는 언어와 글입니다.
본문과 같이 요셉의 열 두 형제들을 통하여
아들이 되는 과정을 잘 그려주고 있습니다.
열 명의 형제와 (5+5)
요셉과 베냐민 (1+1)
이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첫째로
보이는 다섯(육신)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둘째로
보이지 않는 다섯(영과 진리)이 되도록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아들들에게
첫째로 베푸시는 은혜가 올 때에 반드시 땅에 엎드려 절하게 됩니다.
두번 째로
사랑을 베풀어 주시면 누구나 예외 없이 머리를 숙여 절하게 됩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의 머리가 목베임을 당하여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이 때 그리스도의 머리가 그들의 머리가 되어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살게 되지요.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그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는지 들어보면 알 수 있겠지요.
육신과 세상 논리를 앞세우는 말인지
아니면 육신과 세상에 대하여 죽어서 나온 영에 속한 말인지를..
하나님께서 슬퍼하시는 한가지 이유는
자신의 아들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영과 진리로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을 형제로 알지 못하고
애굽 총리로 밖에 알지 못하는 형제들을 보고 슬퍼서 우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처럼 어떤 사람도 스스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그분께서 스스로 울어 주시고
보이는 표면 얼굴을 씻으신 다음에
보이지 않는 얼굴로 오시는 것입니다.
이 때 비로소 깨달은 다섯 마디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베냐민이 받은 다섯 배의 음식이 말해 주듯이...
이 다섯 배의 음식을 먹을 때
새 술에 취하게 됩니다(노아와 같이).
하늘에 속한 성령에 취하게 될 때
육의 몸을 벗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골로새서 2 장 11 절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반복되는 말씀이지만 계속 묵상하다보면 큰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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