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번역은 하나님이 온전하니까 너희도 온전하라로 되어 있지만, 문법상 두가지 선택이 있다. 다른 선택을 한다면, 너희는 온전이다(동사/직설법/미래/중간태)라고 선언한 내용이 된다.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온전할 수 있으니까 예수께서 “너희는 온전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온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5장21-47절을 할 수 있다면 온전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왜 하나님이 된지는 여러분도 잘 알 것이다. 성경의 엘로힘이라는 신명을 어떻게 번역을 할지에 대해 고민을 했다. 상제, 하늘님등을 고민하다가 천주교는 결국 하느님으로, 개신교는 유일신을 강조하여 ‘하나님’으로 지은 것이다. 어쨓든 하나님이라는 이름 안에는 ‘하나’라는 개념이 강하게 들어있다.
이 하나라는 뜻을 잘 담고 있는 영어가 All이다. 이 All이라는 영어는 부사로 쓰일 때는 전체를 뜻하고, 형용사로 쓰일 때는 완전한 이라는뜻으로 쓰인다. All은 예수께서 아버지를 부를 때 쓴 아람어 El과 같은 말이다. 이슬람은 하느님을 Allah로 부른다. 우리 말의 ‘얼’도 올(All)과 같은 말이다. All은 세계 공통어이다. All은 하나이다. 전체에 해당하는 순수한 우리말이 ‘온통’이다. 온통을 사전으로 보면 있는 전부, 쪼개거나 나누지 아니한 덩어리, 또는 온전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 전체를 온통이라고 한다. 온통은 절대하나이다. 온통이 하나님이다.
이 온통에 대비되는 말이 개체이다. 이 개체를 순수한 우리말로 낱동이라고 한다. 낱동은 온통의 부속물이다. 온통 앞에서는 개체가 있다고 할 수 없다. 개체는 우리 눈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없는 거짓’이다. 예를들어 “나”라는 개념을 보자! 나는 거짓 나가 있고 참 나가 있다. 성경에서는 살리는 것은 영(프뉴마)이니 육(싸륵스)은 무익하니라(요6:63)고 한다. 무익하다는 것은 유용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즉 살리는 것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육은 살리는 것이 아니다. 즉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생명은 영이다. 그 프뉴마가 참 나(속나/새나/靈我)고, 육은 거짓 나(겉나/옛나/自我)라는 것이다. 순수한 우리말로 몸나와 얼나라고 부를 수 있겠다.
몸나(ego)는 늘 보이는 것으로 배운 선악지식으로 형성된 자아일 뿐이다. 그래서 부분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온전한 것(얼나)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해진다.
얼나는 하나님의 생명이다. 아버지와 하나라는 것은 그 얼나로서의 하나라는 말이다. 얼나는 너와 나의 구별이 없다. 예수의 얼나가 따로있고 나의 얼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얼나는 하나이다. 이 얼나를 깨달은 자를 아들이라고 한다.
이 얼나에서 분리된 몸나는 끝임없이 얼나를 찾아 방황할 수 밖에 없다. 낱동은 온통을 찾아 그것에 귀속되어야 평화와 안식을 얻게 된다. 그 온통을 <하나>라고 부른다. 하나는 온통이요 절대이다. <하나>의 님이 하나-님이다. 그 하나가 나의 님이다. 님이 존칭어이기보다 연인으로서 님이다. 아버지인 그가 나의 신랑이기도 한 이유이다. 내 애인이기도 한 이유이다. 그 님이 늘 그립다. 늘 함께 하면서도 그리운 나의 님! 그 님이 하나의 님! 하나님이다.
그래서 개체인 인간은 온통, 온통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온통인 하나의 님을 만나야 한다. 그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다. 파도가 바다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도 파도는 자기 혼자 살 수 있다고 우긴다. 얼마나 우스운가? 개체는 전체를 떠나서는 잠시도 존재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나 찾아야 할 것은 전체(하나)이다. 세속의 명예나 부라는 것도 개체일 뿐이다. 오직 전체(하나)를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그 전체(하나)가 아버지이다. 아버지(하나)와 하나되는 것이 참 삶의 목적이다. 그래서 하나 사랑은 아버지 사랑이다.
우리 인생에 수많은 어려운 일, 환란, 고통이 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파동에 불과하다. 바다와 파도로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는 인생의 파도를 만난다. 예수의 제자들도 파도를 만났다. 그 파도 때문에 제자들은 두려워한다. 그러나 예수는 배에서 잠만 쿨쿨잔다. 무슨 차이인가? 제자들은 파도(부분)를 보닌까 죽음의 공포에 떤 것이다. 제자들은 부분을 보았고, 예수는 전체를 보았다. 제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했고, 예수는 죽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죽는 것은 다만 몸나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개체는 하나 하나가 여러 개이지만 온통은 하나뿐이다. 다 같은 하나라지만 개체의 하나와 온통의 하나는 다르다. 개체의 하나는 生滅하는 하나이고, 온통의 하나는 생멸을 초월한 절대의 하나이다. 곧 하나님이시다. 몸아닌 영으로 나와 하나님이 하나이다. 이 영으로서 나, 즉 참나가 나의 본질이다. 삶이란 하나에서 여러 개체로 나눠졌다가(몸 나)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다(참 나). 몸 나는 죽어도 참나는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죽음은 없다.
파도는 밀려 왔다 사라지지만, 바다는 생사를 초월해 존재한다. 우리의 실체는 바다인데, 바다는 보지 못하고 파도에 함몰되어 두려운 삶을 산다. 이런 두려움을 잘 표현한 것이 베드로가 바다에 빠진 사건이다. 그는 바다를 보지 않고 파도를 보았고, 그리하여 물속에 잠긴 것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환경만을 바라본다면 두려움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바다에 빠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전체이신, 하나이신 아버지를 본다면 그것은 바다의 일부분인 것을 알게된다. 그리하여 두려울 것이 없게 된다. 우리 인생에 수많은 어려운 일, 환란, 고통이 있다. 이것은 하나의 님을 만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하나의 님을 만나면 그것조차 바다의 일부인 파도임을 알게된다.
거듭난다는 것은 바로 부분이 전체에 귀속되는 것이다. 개체로서 살면 그냥 짐승과 같다. 그것을 성경에서 탕자라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면 아버지와 하나된다. 아버지와 하나되면 온통을 이어받는다. 그것을 아들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 궁중에서 세숫물을 갖다 바치는 무수리도 하룻 저녁 임금님 품에 안기면 신분이 그만 달라졌듯이 짐승인 사람도 하나님의 영을 받아 부활하면 하나님의 아들로 신분이 상승하는 것이다.
아들이 되면 개체의식이 깨지고 전체의식으로 바뀐다. 獸(짐승 수)性으로 가득한 몸 나에서 하나님의 아들인 참 나가 된다. 이러한 전체의식을 갖게 되는 것을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마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 전체의식, 그리스도의식, 그 아가페를 가졌을 때 온전이라고 한다. 몸 나가 죽고 참 나로 부활한 아들들이 온전이다. 아들들은 하나됨을 안다. 아들들은 부분(자녀/명예/돈/권력/국가)에 희망을 걸지않고 전체에 목숨을 건다. 구름과 같이 변하는 구름에 메달리지 말고 전체인, 구름의 배경이 되는 하늘을 보라! 구름이 삶이라면, 그 삶의 배경이 되는 하늘을 보라! 그 하늘은 늘 그 자리에 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늘을 하나님으로 비유하는 것이다. All, 전체, 온통만이 절대이다. 온통인 절대밖에는 모두 안개요 신기루이다.
'설교 > 새벽기도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기서 나오라 (0) | 2020.04.14 |
---|---|
평화 - 샬롬 - 솔로몬 (1) | 2020.04.14 |
복음은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다. (0) | 2020.04.12 |
세례란 무엇인가? (1) | 2020.04.11 |
부활이란? (0) | 2020.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