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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설교문

오늘은 사는 지혜

by 다바르아마르 2020. 4. 6.

벧후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벧후3: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벧후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벧후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 때문에 우주의 붕괴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할 때 그 물질(스토이케이온/stoicei'on)의 용례를 살펴보자!

 

스트롱코드 : 4747 스토이케이온

[개역]갈 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개역]갈 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개역]골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개역]골 2: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개역]히 5: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개역]벧후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베드로후서를 제외하고 그 물질(체질)이 모두 초등학문 내지 초보로 번역되고 있다. 스토이케이온의 용례는 문자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주의 물리적 구성요소인 원자미립자로 쓰이는 경우가 성경에는 없다. 그것은 한결같이 초등학문, 초보에 관해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옛언약(율법)에 대한 내용이다. 그러므로 체질의 풀어짐은 옛 언약질서,  유대주의에 대한 붕괴를 의미한다. 유대주의는 나의 옛 사람의 구조를 대표한다.

 

벧후3:13에서 베드로가 언급한 그의 약속은 이사야서 65:17의 약속이다.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65:18]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기쁨으로 삼고

[65:19]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65:20]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 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자이리라

[65:21]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65:22] 그들이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내가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며

[65:23]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

[65: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65: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이사야는 메시야가 통치하는 나라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죽어서 가는 천국에 대한 표현이거나, 역사의 끝에 대한 묘사일 수 없다. 왜냐하면 나무처럼 오래 살지라도, 여전히 사람들이 죽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집짓고, 농사하고, 아이를 낳는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우주가 붕괴되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옛성전이 무너지고 내가 성전이 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34:4]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 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으리라

 

이것을 보고 하늘이 무너지리라고 생각하는가? 이 문장은 에돔의 멸망에 대한 것이다.

 

[66:22]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옛 하늘과 옛 땅은  옛 성전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새 성전이다. 바다(율법)가 없는 하늘과 땅이다. 바로 그 그리스도안에(in Christ) 세워지는 새로운 성전이다.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코로나 바이러스로 죽음의 공포가 온 세계를 덮고 있는 이때 우리들은 새 성전으로 세워져가는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열 처녀 비유의 결론이다. 기름이 부족하여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처녀들에게 한 말이다.

 

과거에 깨어 있으라 하면 쉬지 말고 기도하고 주님 오실 때를 기다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 비유를 유심히 보면 깨어 있는 것과 기름이 같은 개념으로 나온다. 기름이 떨어진 것을 깨어있지 않는 것과 비유한 것이다. 깨어 있으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깨어 있다는 것은 의식을 가지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의식을 가지고 항상 지금’ ‘현재를 살아간다. 그러므로 매 순간 의식으로 살아간다. 이런 사람들은 늘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다. 깨어있어야 혼인잔치에 들어간다고 성경은 말한다.

깨어있는 자만이 신랑과 혼인잔치를 할 수 있다. ,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 수 있다. 이들에게는 하늘의 문이 열려있다. 그러나 미련한 처녀에게는 그 문이 열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깨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깨어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을 진다. 책임이라 하면 의무와 동의어로 생각할지 모르겠다. 의무는 마지못해 하는 행위이다. 남편에 대한 의무, 아이들에 대한 의무, 이런 것들은 책임이 아니다. 책임(responsibility)이라는 단어는 response+ability 이다. 반사적인 행동을 뜻하는 reaction과 전혀 다르다. 반사적인 행동은 과거의 세뇌작용에서 비롯된 기계적인 것이다. 그러나 반응(response)은 깨어있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새롭게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깨어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 내 뜻을 가리지 않는다.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 내 뜻 구별한다는 것은 너와 나로서 분리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그 날과 그 때를 모른다. 사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항상 지금 깨어 있으란 말이다. 지금 깨어 있는 자는 이미 하늘 문은 열려 있고, 깨어있지 않은 자는 지금 문이 닫혀 있고, 닫힐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성전으로 만들어가시는 과정으로서의 인생이 주어져 있고 인생살이에서 만나는 모든 사건들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성전의 완성을 위한 표적(세메이온)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19 사건도 표적이다. 분명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사건이다.

 

깨어있으라는 말은 기름을 준비하라는 말이고 기름은 성령 즉 거룩한 말씀을 예비하라는 말이다. 즉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존재가 되라는 말인 동시에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이다.

 

우주의 종말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죄이다. "나를 믿지아니함이 죄"라고 말씀하셨다. 믿지 않는다는 말은 모른다는 말이다. 다시말해 잘못 알아듣고 있다는 말이다.

 

육신적으로는 고단한 시간을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선명하게 이해하고 따라가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두려움이 그들을 공격할 수 없다. 오히려 지금 바로 이 시간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더 풍성한 삶으로 나아가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우리 중앙의 식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 즉 그분의 임하심으로 말미암는 깊은 깨달음이 더 풍성히 넘쳐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