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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설교문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by 다바르아마르 2020. 4. 13.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이 아마도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일 것이다. 구원은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이다. 그렇다면 아들이 육신을 벗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런 질문과도 같을 것이다.

 

세상은 절대계와 상대계가 있다. 상대계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세계이며. 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 절대계라 할 수 있다.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상대계에 사는 것일 것이다. 예수께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다(10:30)라고 선언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보다 크다고도 말씀하셨다(14:28).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러한 질문에 비유로 답해보자!

 

마음의 세계는 하나이다. 구원이란 아버지와 한 마음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헬라어로 마음은 '누스(3563)''카르디아(2588)'가 있다. 누스는 절대계의 마음으로 변하지 않는 마음이라고 본다면, 카르디아는 수시로 변하는 상대계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누스가 하늘이라면, 카르디아는 하루 하루 다른 구름과도 같다고 할 수 있겠다.

 

누스를 물이라고 비유하고, 카르디아를 물결에 비유해보자! 물은 늘 그대로이다. 그런데 물결은 일어나고 없어진다. 변화 무쌍하다. 모든 물결의 實相은 오직 하나의 물일 뿐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그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였다. 모양으로 번역되어 있어 어떤 형태를 갖춘 것으로 보이지만 데무트란 닮음이란 뜻이다. 형상이 오히려 형태를 갖춘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창조된 것이다. 그런데 마음(카르디아)이 보이는 것만을 섬기면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카르디아)이 아버지의 마음(누스)으로 메타노에오(회개/한 마음)될 때 구원이라고 하며, 그럴 때 아버지처럼 절대계의 시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즉 전체로서 세상을 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상대계인 몸에서 벗어나 절대계인 ''을 깨닫게 된다. 만약에 ''을 자기라고 생각을 하면 물결이 사라져 없어지는 것같이 '생멸'하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영생'을 잃어 버린다. 이것이 실낙원의 의미이다.

 

그러나 온 세상이 하나의 마음(누스)임을 안다면 형상을 너머 그 마음이 되어 버린다. 그것을 一心이라고 하며, 그것을 회개(메타노에오)라고 한다. 즉 한마음(메타+누스)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회개하면 시공간을 포함한 우주 전체가 한마음인 것을 깨닫고, 온통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체임을 깨닫게 된다. 이 마음(누스)를 깨달을 때에만이 '이웃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이것이 자기 존재의 발견인데, 이 발견이 있을 때에만이 절대 행복(안식)을 누릴 수 있다. 안식은 행복과 불행의 의미를 넘어선다. 행복과 불행 조차도 분별의식이다. 행복/불행을 그대로 인정할 때 안식, 즉 상대 행복이 아닌 절대 행복을 누린다.

 

생각을 해보자! 지금 내가 자판을 두드리는 것도 마음의 작용이 아니겠는가? 커피를 마시면서 음미하는 것도 마음의 작용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우주 전체가 하나의 마음(누스)의 작용이 아니겠는가? 아침에 해 뜨는 것도 절대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 우주를 움직이는 그 누스와 하나될 때(회개) 아버지를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아들인 나와 아버지가 같으며, 또한 아버지가 아들보다 크지 않겠는가?

 

나는 어쩔 수 없이 물결속에 살아가지만, 메타노에오 하는 순간 물결이 물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때 죽음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마치 예수께서 그러신 것처럼 풍랑가운데 주무시지 않겠는가? 제자들은 물결을 보았지만 예수는 물을 보았지 않았겠는가?

 

그 누스를 순수 우리말로 本心이라고 한다. 本心本體이다. 물이 본체라면 물결은 본체의 작용이다. 본체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존재 자체이다. 그러나 작용은 물결처럼 生滅한다. 물결이 본체의 작용이듯 아들은 아버지의 작용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본심의 작용이다. 물론 살아있는 자만이 그 작용을 깨닫는다. 복음을 깨닫는 것은 바로 세상의 모든 것은 그 아버지의 일하심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이 곧 은혜이다. 영생없는, 상대계에서 나의 힘으로 열심히 살아갔던 그것은 물결에 불과하고, 더 넓은 물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 복음이다. 그래서 복음은 참 삶을 살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 질문에 다시 답해보자!

 

우리는 상대계에 산다. 거듭난 자는 이미 상대계에서 절대계를 산다. 죽는 것은 상대계, 즉 몸일 뿐이다. 파도는 매일 쳐도, 바다는 그대로이다. 구름은 늘 변해도 하늘은 그대로이다. 그렇다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는 자체가 아직 물결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자는 풍랑가운데에서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예수처럼...,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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