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새벽기도 말씀

아버지의 긍휼이 아들의 긍휼로

by 다바르아마르 2020. 4. 1.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산상수훈은 조건과 그에 따른 보상이 아니다. 가난한 자! 애통한 자! 빼앗긴 자! 그리고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주어지는 천국을 그린 것이 복이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도 우리가 누군가를 긍휼히 여기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면, 우리의 긍휼이 하나의 조건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또 조건과 결과가 되어 복음과 상치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우선 가난한 자! 애통한 자! 빼앗긴 자! 주린 자! [긍휼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의 상태가 상당히 다른 느낌을 준다. 가난한 자, 애통한 자, 빼앗긴 자, 주린 자에게 찾아오는 복음이다. 그런 자들을 긍휼한 자로, 마음이 청결한 자로, 화평하게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긍휼한 자는 바로 앞에 의 결과이다. 즉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인한 성전이 되었을 때 나오는 상태가 [긍휼]이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이 10~12절이다. 라다프이다.

 

이러한 관계속에서 긍휼을 이해해야지 7절만 별도로 조건으로 이해한다면 복음이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가 된다.

 

긍휼이라고 번역된 엘레에몬(1655 ejlehvmwn)은 엘레에오(1653 ejleevw)에서 온 형용사인데 동사 엘레에오는 불쌍히 여기다. 자비를 베풀다라는 뜻이다. 이러한 동사의 형용사이므로 그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행위보다는 어떤 상태를 형용하는 것이다.

 

긍휼이라고 번역된 엘레에몬은 히브리어로 [한]에 해당하는 말이다.

 

@WNj'(2587, 한눈)

은혜로운, 자비로운

 

은혜로운, 자비로운이라는 뜻인데 이 한눈은 주로 [라훔]과 함께 쓰인다.

 

!Wjr"(7349, 라훔)

자비로운, 동정심이 있는

 

라훔(형용사)은 라함(!j'r; , 7355)에서 유래했으며, '긍휼히 여기는, 자비로운, 동정심이 있는'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3회 나온다.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라훔) [은혜롭고/하눈] 노하기를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대하 30:9 너희가 만일 여호와께 돌아오면 너희 형제와 너희 자녀가 사로잡은 자에게서 자비를 입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리라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신지라 너희가 그에게로 돌아오면 그 얼굴을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시리라 하였더라

 9:17 거역하며 주께서 저희 가운데 행하신 기사를 생각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하며 패역하여 스스로 한 두목을 세우고 종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사오나 오직 주는 사유하시는 하나님이시라[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저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9:31 주의 긍휼이 크시므로 저희를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긍휼히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103:8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111:4 그 기이한 일을 사람으로 기억케 하셨으니 여호와는[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도다

 116: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145:8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86:15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4: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공통점이 무엇인가? 한결같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묘사할 때 쓰이는 관용구적 표현이다. 따라서 엘레에몬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특별히 라훔()은 동사 라함에서 유래했는데, 라함(!j'r) 윗사람이 아래 사람에 대해 갖는 사랑을 뜻한다. 젖먹이 아이에 대한 어미의 사랑(49:15), 아버지의 사랑(103:13).

 

103: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7355  !j'r:)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하난과 라함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할 때 쓰이는 동사이다.

 

33: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n"j)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j'r)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5절은 출 33:19의인용문구이다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11:30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11: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지금은 이방인을 위한(11:30), 그 다음에는 유대인을 위한(11:31), 따라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11:32)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에 근거한다. 구원은 선행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긍휼히 여기심에 근거한 것이다(참조:  2:4-9;  3:5). 바로 이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 구원의 근원이다. 이유이다. 출발이다.

 

[ 54:10]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찌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러분 호세아에 보면 호세아의 음란한 아내 고멜이 딸을 낳자 그 이름을 뭐라고 짖습니까? 로루하마라고 짓는다. 무슨 뜻입니까?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지 못함(1:6)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루하마로 이름을 짖는데 이 루하마가 라함의 푸알 완료 여성형으로 긍휼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로루하마를 루하마로 만드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호세아서는 그래서 교회의 이야기이다.

 

[벧전 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 9:25]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그런데 사도 바울은 긍휼이라는 단어 대신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사랑받은 자이다.

 

따라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할때,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말하며, 하나님의 의에 의하여 성전이 되어진 자에게 나오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긍휼한 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의에 의하여 긍휼한 자! 자비로운자! 사랑스러운 자!가 된 것이다. 어떤 자비의 행위를 하면 자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비의 상태인 자!를 말하는 것이다.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이 긍휼이다. 자비, 은혜, 사랑이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가 엘레에몬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자긍휼한 자이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가난한 자, 애통한 자, 빼앗긴 자, 주린 자들이 모두 긍휼의 대상이다.  아버지의 긍휼로 아들이 긍휼을 입은 자가 되는 것이다.

 

ejleevw(1653, 엘레에오)

불쌍히 여기다, 자비를 베풀다.

 

이 구절에서 동사는 수동태가 사용되어 그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간접적으로 나타낸다. 먼저 긍휼이 여겨 주셨고, 그래서 성전이 된 자(의를 받은 자)도 긍휼한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먼저이다.

 

이 긍휼에 대한 복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가 바로 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18:23)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 18:24)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 18:25)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 18:26)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 18:27)

 

만 달란트: 우리나라 국가 일년 예산이 약 390. 1년동안 로마에게 조공을 바친 금액이 800달란트였다. 그러므로 만 달란트는 갚을 수 있는 돈이 아니다. 갚을 수 없는 돈을 갚겠습니다!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 열심히 율법지켜! 이 말을 듣고 예! 다 지키겠습니다.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 18:28)

 

목을 잡고: 목을 졸랐다. 동료: 임금을 같이 섬기는 자. 이 용서의 가치를 깨달았다면 백 데나리온은 새발의 피이다. 그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 18:29)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 18:30)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 18:31)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 18:32)

 

빌기에: 다 갚겠다고 빌었다. 갚을 수 없는 것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것을 탕감.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18:33)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 18:34)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 18:35)

 

이 비유의 핵심은 무엇인가? 주인이 먼저 빚을 탕감해 주었다는 말이다. 빚탕감을 용서와 연결해서 말하고 있다. 주인이 먼저 용서해 주었으니, 너희도 용서하라는 말이다. 이것이 긍휼이다. 이 긍휼을 받았다면 긍휼한 자이고, 긍휼한 자이면 당연히 그 마음을 알테고, 주인처럼 빚을 탕감해 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용서의개념이다. 내리 사랑이다. 내리 긍휼이다.

'설교 > 새벽기도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  (0) 2020.04.03
아들의 긍휼  (0) 2020.04.02
목마름과 배고픔  (0) 2020.03.31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  (0) 2020.03.29
새로운 땅  (0) 2020.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