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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새벽기도 말씀

아들의 긍휼

by 다바르아마르 2020. 4. 2.

성경은 하나님의 긍휼로 가득하다.

 

[ 49:13]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임이니라

 

[ 7:19]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 2:23]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 39:25]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긍휼을 베풀찌라

 

복음서에서 치유사건은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5: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있기를 간구하였으나 

5:19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5: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따라서 오늘 본문의 긍휼은 하나님의 긍휼을 강조하는 것이다. 의가 [하나님의 의] 이듯이 긍휼도 하나님의 긍휼이다. 하나님의 의로 아들이 성전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긍휼로 아들이 긍휼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들이 복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긍휼이 여기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긍휼이 먼저이다.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듯이 하나님의 긍휼이 아들을 긍휼한 자로 만든다. 그것이 만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의 내용이다.

 

그래서 긍휼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가지는 사랑이다.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이 긍휼이다. 그것이 은혜와 자비이다.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skhnovw)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qeavomai) 아버지의 독생자(/휘오스라는 말이 없다)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육신에 담기어 말씀/육신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거하였다. 거하다라는 말은 스케노우(4637  skhnovw)로 천막을 쳤다는 말이다. 말씀/육신인 그리스도를 성막, 성전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8복과 같은 맥락이다. 하나님의 의로 성전이 되었다. 그가 아버지의 유일한 영광이다. 본문은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에 해당하는 휘오스라는 말이 없다. 본문에는 휘오스가 없이 그냥 모노게네스이다. 따라서 번역을 독생자의 영광이 아니라 유일한(비길데 없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해야 맞다.

 

그리스도는 아버지로부터의 유일한 영광이다. 그가 유일하게 아버지를 나타낸다는 뜻이다. 영광은 나타낸다는 뜻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나타냄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리스도가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래서 그가 유일한 구원자(예수가 구원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은혜와 진리가충만하다.

 

참된 지식에는 은혜가 있다. 그러나 자기 지식은 은혜가 없다. 참된 지식은 은혜를 고백하게 끔 되어 있다. 은혜와 진리만이 진정한” “생명의” “을 살게 한다. 그렇다면 은혜와 진리는 무엇인가?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5485  cavri") 호의, 선물, 자비를 뜻하는데,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행복, 선물이라는 뜻이다. 카리스의 주체는 분명히 하나님이다.

 

바울이 특별히 카리스를 강조하는데 기본적인 사상은 값없이 주신다는 것이다.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카리스이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에서 구체화된다( 2:21).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 은혜는 값없이 주는 하나님의사랑이다. 그리고 진리란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말하는데, 히브리 개념의 진리는 에메트이다. 히브리어 에메트는 신실하다” “신뢰할 만하다라는 뜻이다. 히브리어 에메트는 무엇인가 불변하기 때문에 신실하다라는 것이다. 무엇이 불변하다는 것인가? 헬라철학처럼 변하지 않은 원리로서 불변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약속에 대해 변하지 않고 신실하다라는 뜻이다.

 

히브리 개념의 진리는 그래서 철학적 담론이 아니라 역사에 그의 약속을 성취해 가기 때문에 그래서 여호와는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헤세드라 하고 은혜와 자비롭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을 [긍휼]이라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긍휼한 자는 이러한 헤세드를 받은 자이다. 그래서 성전이 된 자이다. 그 성전이 하나님의 유일한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와 하나된 아들에게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 아버지의 약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보면 하나님이 약속에 얼마나 신실한가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모든 구약의 언약이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플레로마)되니 얼마나 언약에 충실한 하나님인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그 신실함의 표현이 헤세드와 에메트이다. 그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기 위해서 때로는 책망도 주시고, 재앙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헤세드이다. 그것이 바로 긍휼이다.

 

그런데 은혜와 진리의 개념이 다소 모호해질 수 있는데, 그래서 요한은 17절에 은혜와 진리를 율법과 대비한다. 그리고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를 대비한다. 은혜와 진리는 율법의 완성(플레로마)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의 완성(플레로마)이다. 율법을 통해서 은혜와 진리를 드러내는것이고, 모세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렇게진리는 율법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이다.

 

진리라는 것은 실체를 드러낸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방법이 거짓을 통해서 실상을 드러낸다. 그것이 율법과 진리 개념이다. 즉 율법의 실체는 언약이다. 그 약속을 발견하면, 과거의 거짓말, 속임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로 배부른 자는 이러한 긍휼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일만 달란트빚을 탕감 받은 것을 안다. 긍휼한 자이다. 긍휼한 자는 또한 빚을 탕감해준다. 그는 긍휼을 베풀 것이다. 그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난한 자, 애통한 자, 빼앗긴 자, 주린 자에게 그 은혜와 진리를 줄 수 있다. 아버지의 사랑을 전할 수 있다.이것이 참된 섬김이다.

 

성전이 된 자는 이제 그래서 섬길 수 있는것이다. 아버지처럼 긍휼의 마음으로 사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진리를 어렴풋이 알면 기존 종교를 비방하는데 바쁘다. 그러나 한 생명을 이해하게 되면, 모든 생명을 긍휼의 마음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 전에는 바리새인의 눈으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분류했지만, 이제 성전이 되어 생수의 강, 단물을 흘려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치유가 일어난다.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치유사건은 사도행전 3장에 나온다. 이 사건을 통해서 긍휼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3:1 제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3:1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간다. 그런데 그 뒤에 계속되는 말씀을 아무리 눈씻고살펴보아도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런 기도를 하는 장면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3: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오히려 성전 미문에 있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치유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못 걷는 이를 치유해주는 것이 진정한 기도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약속은 누가 했는가? 하나님이 하셨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다. 그 소원이 하나님의 기도이며, 하나님의 긍휼이다. 기도란 하나님의 원함을 알고, 그 원함을 가난한 자에게 흘려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원함을 넘겨 받아 치유되는 것이 기도이다.

 

하나님의 의를 가졌다는 것이 내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긍휼은 이제 그 의가 흘러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불구자가 성전 미문에 앉아 있다. 그 말은 옛성전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지금 베드로와 요한이 불구자를 치유해주는 시점이 언제인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있고 난 후이다. 산상수훈으로 말하면 성전이 된 이후에 주리고 목마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다. 단물을 흘려 주는 것이다. 그것이 긍휼이다. 성전이 된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옛성전은 불구자의 필요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데 이제 새성전이 된

(마5:7) 베드로와 요한이 그 문제를 해결해 준다. 어떻게?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한다. 이제 보이는 보물의 대표인 은과 금은 없다. 은금은 성전에 사용되었다. 옛성전을 가르켜 하는 말이다. 예전에는 성전 생활을 했지만 이제 내게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셈),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예전에는 쓴물만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내게 단물이 있으니 이것 마셔라! 절름발이의 히브리어는 짜라이다. 짝이라는 뜻이다. 제대로 된 짝이 없는 것을 절름발이라고 한다. 그에게 제대로 된 짝을 소개해준다. 바로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의를 넘겨받고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이 긍휼이다. 진리를 알게 되면 뭐가 달라지냐고 많이 묻는데 8복에 의하면 바로 긍휼이다. 비판에서 긍휼로 돌아선다. 정죄의 대상이 아니라 이제 긍휼의 대상인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마음과 하나된 마음은 긍휼하게끔 되어 있다. 그들의 불구됨이 보인다. 그리고 그들을 일으켜 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11:32, 개역)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우리는 모두 율법 가운데 태어난다. 그래서 순종치 못하는 상태로 가두어 두었다고 하는 것이다. 스스로 이룰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결국은 아버지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우리가 긍휼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긍휼 때문이다. 모든 사람을 율법 가운데 가두어 두신 것은 아버지이다. 그래서 율법/종교 생활하는 사람들도 아버지가 가두어 두셨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결국의 목적은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다.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속박당해 있는 자들에게 긍휼을 넘겨주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기도이다. 출애굽기도 속박 당해 있는 자들에게 넘겨주는 긍휼의 내용이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불구자처럼, 오늘날도 교회에 앉아 있는 불구자들이 많다.

 

그들이 바로 가난한 자, 애통한 자, 빼앗긴 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다. 그들을 어떻게 찾아가겠는가? 수고와 멍에를 지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모세를 보낸다. 그렇게 보냄을 받은 자를 통해 하나님의 참된 긍휼의 복음을 전해 듣는 것이다. 지금도 이 일들을 누구를 통해서 이루는가? 바로 긍휼한 자를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의에 배부른 자들을 통해서 말이다. 맛본 자가 그 맛을 안다. 이것이 애벌레와 다른 나비의 삶이다. 애벌레가 이제 나비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복음이다. 이제 하늘을 날며 사랑의 씨앗을 나르며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긍휼한 자로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중앙의 식구들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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