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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새벽기도 말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

by 다바르아마르 2020. 3. 29.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페이나오(3983 peinavw)는 굶주리다라는 뜻인데 페네스(3993  pevnh")에서 유래한 말이다. 페네스는 가난이라는 뜻이다. 이것도 가난과 관련이 있다. 굶주리다라는뜻에서 파생된 상징적 의미로는 이것 없이는 살 수 없어서, 그것을 간절히 열망하는 것을 뜻한다. 누가복음을 보면 더욱 선명하다.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6: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너희가 지금 굶주린 자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미래에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에는가난한 자! 우는 자! 주린 자!가 나란히 배열되어 있다. 현재 불행을 겪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들에게 행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배고픔만큼 비참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라는 단어가 추가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가 무엇인가?  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라고 하면 단순히 정의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 정의를 강조한 것이 해방신학이다. 이때 의로운 사람은 불의를 보면 참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또 유대인은 의를 율법을 잘지키는 언약적 신실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이 가진 의의 개념을 깨기 위해 안식일도 고의적으로 범하고 그랬다. 의라는 개념은 사실 광범위하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생각한 의가 무엇이냐?라는 점이다.

 

가난-애통-온유와 연결되는 것이 주림이고, 천국-위로-땅과 연결되는 것이 배부름이다. 그런데 무엇에 배부르다는 것인가? 의로 배부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는 [천국-위로-]과 연결되는 개념이다. 즉 천국이 곧 의이다. 앞으로 산상수훈을 계속해서 살펴보면 이러한 개념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6:33의 말씀이다.

 

[ 6:33] 그런즉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나라와 의를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이다.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의이다. 따라서 의란 하나님 나라이다. 그래서 의에 주린 사람이라는 뜻은 하나님 나라에 주린 사람을 뜻한다. 마태복음은 의를 하나님 나라와 연결하고 있고,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6:8 그가 와서 에 대하여, 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16:9 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6:10 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의가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고, 예수를 다시 다시 보지 못하는것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의는 예수가 죽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예수께서 죽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를 보지 못하는 것이 의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와 다른가? 도대체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어떻게 의일까?

 

예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셨는가?는 본문의 앞뒤 구절을 보면알 수 있다.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예수가 떠나야만 보혜사가 오신다는 것이다. 보혜사는 누구인가? 13절에 의하면 진리의 성령이다. 그가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가 예수가 말한 것을 풀어주신다는 말이다.

 

즉 의란 성령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진리의 영이 배불리 먹여준다는 것이다. 진리의 영!  말씀으로 배불리 먹여주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말씀으로 다스리는 나라이다.

 

그것을 계시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7: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peinavw) 아니하며 목마르지도(diyavw)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오늘 본문과 똑같은 표현을 쓰고 있다. 더 이상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는다. ? 전문맥이 그 답을 준다.

 

 7: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latreuvw db'[)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5절에 장막을 치시리니라는 말이 나오는 데, 장막을 친다는 것은 장막절과 관련이 있다. 이제 그들 위에  장막을 치셨다. 1:14과 같은 말씀이다. 장막절이되었다. 그 말은 이제 새로운 성전이 되었다는 말이다.

 

고전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새성전이 되니까 더 이상 주림과 목마름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림과 목마름의 실체는 무엇인가?

 

 7: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장막을 치면, 어린 양이 목자가 되어 생명수 샘으로 인도한다(34:23). 그 목자가 다음과 같이 외친다.

 

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7: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한 절기가 명절 끝이라고했다. 즉 장막절이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장막절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장막절이란 무엇인가? 말씀이 육신에 장막을 치는 것이다. 그래서 육신이 말씀/육신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라고 한다. 그러면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게 된다. 내가 장막절되는 것, ‘성전이 되는것을 라고 한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 때문에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목마름이 해결되는 것이다. 그것이 배부름의 진정한 의미이다. 말씀의 생수가 흘러 넘치는 것이다. 그때 참된 예배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밤낮 하나님을 예배하매~라고 본문은 말하는 것이다.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latreiva)니라

 

그렇다면 몸이 성전이 된다는 말은 무엇인가?

내안에 성령이 계시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말한 의 개념과 같다. 예수의죽음으로 보혜사가 오는 것을 라고 한다. 나라는 육신에 말씀으로 함께 할때, 나는 성전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성전이 되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은혜와 진리가 완성된다. 그래서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예배이다.

 

그래서 의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내가 성전이 되는 것이다. 즉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강조한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의이다.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마침이 되시니라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dikaiosuvnh)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그리스도의 믿음/소유격)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

 

내가 가진 의는 그리스도의 믿음에 기초한 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이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하나님의아들의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래서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을 의라고 한다. 이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 하나님의 의란 자기 의와 반대되는데, 자기 의란 내가 열심히 율법을 지켜 그 의를 취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의인은 없나니 한 명도 없다. 의는 오로지 하나님의 의만 있다. 율법은 항상 둘로 나눈다. 그래서 율법으로 구원을 이루려고 하면 항상 둘로 분리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조차도 너와 나의 관계로 전락해 버린다. 열심히 율법을 지켜 하나님을 섬기려 한다. 그렇게 됨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닌 주종의 관계로 전락한다. 율법을 통하여 죄인임을 깨달아야 하는데, 오히려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고 한다.

 

그러나 이제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산다는 말은 나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산다는 말이다. 그것을 성전이 되었다라고 하는 것이다. 성전이 되었다는 것은 나와 그리스도가 하나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분리주의자인 바리새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노게노스  하나로 사는 것이다. 그것이 이다.  로 사는 것이 구원이다. 구원은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하나됨에서 오는 결과일 뿐이다.

 

주리고 목마름만큼 비참한게 없을 것이다. 그 그림을 빌려 자기 의로는 주리고 목마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리고 목마름에서 배부름의 기쁨처럼 하나님의 의로 살 때 기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로 산다는 말은 나의 죽음을 전제로 한다. 즉 우상의 죽음이다. 나는 우상이다. 우상이 죽어야만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산다. 그런데 죽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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