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이러한 義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스스로 가능한가? 인간이 하나님의 의를 알 수 있는가? 스스로 알 수 있는가? 알지 못한다.
시14: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시14:3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14: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어둠에 처해있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창1:2은 무저갱(테훔)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무저갱에 빛이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예수와 똑같이 죽음으로 몰아간다. 그래서 이러한 義를 알게 하려고 일부러 광야에 데려오시고 광야에서 주리고 목마른 상황으로 몰아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의는“하나님의 의”이다.
누가복음에는 주림만 나오지만 마태복음은 목마름(1375 딥사오)이 추가된다. 마태복음은 의도적으로 출애굽기와 연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림과 목마름을 그림으로 가장 잘 그려준 것이 광야교회이다. 8복은 출애굽 여정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했다. 6절은 배고픔과 목마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광야에서 땅을 소망하듯이 배고픔과 목마름은 광야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아는 자가 친구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친구를 만들어 약속의 땅을 선물하신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뜻을 알려주기 위해 배고픔과 목마름을 사용하신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 8:2)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7456 b[er)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8:3)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에 이스라엘 백성을 몰아넣으시고, 육신적인 주림과 목마름을 통해서 “의”를 가르친 것이다. 주리게 하시고 또 만나를 먹이시는 것은 그 떡을 먹고 잘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고 주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말씀으로 사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이며, 또 그것이 하나님의 의이다.
마4: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페이나오)
예수님의 굶주림은 이스라엘 광야 시험의 재현이다. 이 시험의 근본은 사람이 떡으로 살 것이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냐? 에대한 것이었다. (마4:4; 눅 4:4; 신 8:3).
광야에서 주림과 목마름을 통해 가르치고자 한 것이 있다. 주림과 목마름을 통해 어떻게 “의”를 가르쳤는지 살펴보자!
먼저 목마름을 통해서 어떻게 의를 가르쳤는지를 보자!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못하고 (출 15:22)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출 15:23)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출 15:2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마라를 생수로 바꾼 곳)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출 15:25)
질문/ 율법은 어디에서 정했을까?
대부분 사람들은 법도와 율례를 시내산에서 정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출15장의 마라 사건에서 이미 법도와 율례를 정했다고 한다. 즉“의”이다. 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가르쳤다.
4785 hr:m; Marah {maw-raw'}
4751의 여성형과 동일함;‘쓴’;광야의 한 장소 ‘마라’:-마라 Moreh,모레 4175를보라
4751 rm' mar {mar}or (fem.) marah {maw-raw'}
또는(여성형) marah, 마라; 4843에서 유래;‘쓴’(문자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또한(명사로서)‘쓴 맛’, 괴로움, 혹은(부사)‘쓰게’, 몹시:-+화난, 쓴(쓰게, 쓴맛), 쓰라린, 불만스러운, ×큰,무거운
마라라는 뜻은 쓰다, 괴롭다. 무겁다라는 뜻이다. 이 쓴 물을 단 물로 만드시고 그곳에서 법도와 율례, 즉 율법을 정했다고 말씀하신다.
4985 qt'm; mathaq {maw-thak'}
기본어근:‘빨다’;함축적으로 ‘맛보다’, 혹은(자동사)‘달콤하다’:-달다(달게 하다)
무슨 말인가? 율법이라는 쓴 물에서 단 물로 바꾸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율법이라는 쓴물은 반드시 단물이 되어야 한다. 요한복음에서는 율법과 은혜와 진리를 대조하고 있다. 즉 율법을 통해서 은혜와 진리를 발견하게 한다. 은혜와 진리, 즉 헤세드와 에메트는 약속에 대한 신실함 개념이다. 즉 율법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있다.
이 정신을 모르니까 율법의 조항을 잘 지켜 자기 의를 챙기려고 한다. 우리에게 진리를 전하는 방식은 처음에는 율법으로 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물(율법)은 마실 수 없다. 그래서 마실 수 있는 물로 바꿔주신 것이다. 그 물을 바꿔주는 것이 나무이며, 나무에 달린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예수가 마리아를 통해서 나온 것이다. 마리아는 구약의 미리암이다. 미리암은 바로 마라에서 유래했다. 물이 쓰면 먹지 못할 것이다. 물을 마시지 못하면 그것을 “목마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제 예수께서 다른 물을 제시한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되리라[요4:14, 개정]
그러니까 이 사마리아 여인은 지금까지 다섯이라는 남편 즉 율법의 물을 마시고 있었지만 그 물은 그에게 생수가 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 다섯이라는 율법의 물은 그 물을 마시고 살라고 준 것이 아니고 그 물로는 목마름을 해갈하지 못하는 것을 알아 그리스도가 친히 주시는 물을 마시라고 준 물이었던 것이다. 그 뒤에 나오는 말씀에서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의 그 말을 듣고 어떻게 했다고 하지요? 자신의 물동이를 집어 던지고 돌아갔다고 나온다. 하나님이 정말 주시려는그 물, 즉 그 의를 안 것이다. 전혀 그 의에 대해 갈급해하지 않던 그 여인에게 그것에 대한 이해가 생겨서 그는 이제 그 의에 대해 배부른 자가 된 것이다.
그녀가 마신 물이 “솟아나는 샘물” 즉 단물이다. ‘나무’를 쓴물에 집어 던지니 단물 즉 생수가 되었다. 모세는 예수를 통해완성되는 것(요1:17)이다.
이제 주림의 문제를 살펴보자! 주림은 양식에 대한 것이다. 양식을 통해 하나님은 무엇을 가르치려 했는가?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 인간은 먹지 않으면 배고픔을 느낀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출 16:1)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출 16:2)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b[;r) 죽게 하는도다 (출 16:3)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출 16:4)
원문은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린다'가 아니라 하늘에서 양식을 비내린다이다. 일용할 것을 날마다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그의 날 안에서 하루의 말씀으로 거두라고 원어는 되어 있다. 일용할 것이 아니라 일용할 “말씀”으로 거두라고 되어 있다. 즉 만나를 내려주시고, 그것을 통하여 일용할 하늘 양식, 말씀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입에 들어가는 양식을 먹으면서, 그것을 통하여 하늘 양식이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그 만나를 그날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율법도 마찬가지로 진리의 양식으로 먹어야 한다.
성경은 육신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그것을 육신적으로 해석하면 진리로 간직할 수 없다. 그런 테스트를 하기 위해 땅에 두었다.
굶주림과 목마름의 이유는 배부름에 있다 배부르게 하기 위하여 굶주림과 목마름을 허락하신 것이다.
이 만나 사건을 자세하게 강해한 것이 바로 오병이어 사건이다.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요6:30)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요 6:3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진리의) 떡을 주시나니 (요 6:32)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 6:33)
만나는 참 떡! 참 양식을 알려주기 위해 주었다. 진리의 떡이다. 만나를 통해서 통해서 진리를 알게 하고자 함이다. 율법에다가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하늘의 양식이다.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요 6:34)
요6:35 예수께서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페이나오)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딥사오) 아니하리라
내가 생명의 떡이다. 그리스도가 생명의 떡이다. 그리스도로 인해 페이나오와 딥사오가 해결되는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믿음을 소유한 자는 주림과 목마름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요 6:36)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 6:47)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요6:48)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 6:49)
오병이어 받아 먹어도 죽는다.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 6:50)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 6:51)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52)
또 육신의 언어로 받아드린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3)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4)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요 6:56)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요6:57)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 6:58)
이 떡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만나의 실체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자신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산다고 선언한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요 6:59)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요 6:60)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요 6:61)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요 6:62)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요 6:63)
육은 살과 피이다. 언제 살과 피를 마시라고 한 것이냐? 말씀이 영이고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생명, 그 진리를 당신의 살과 피로 빗대어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만나사건을 통해 알려 주신 것은 유일하게 생명을 주는 것은 말씀이지, 육(자신의 살과 피)을 먹으라는 말이 아니다. 육으로 보이는 만나를 통해 “그 말씀”을 알게 하려고 준 것이다.
성만찬의 의미도 바로 이것이다. 육신의 떡과 포도주를 통하여‘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결국은 “말씀”을 뜻한다. 따라서 말씀이 곧 떡이요 포도주이니 외형적인 성만찬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된다. 외형적인 것에 매달리면 그것이 오병이어 사건을, 만나 사건을 이해하지 못한 이스라엘, 제자들과 마찬가지이다.
말씀을 사람들이 잘 살기 위해 적용하려고 받으면 그것은 전부 쓴물로, 만나로 받는 것이 되는 것이다. 솔직히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드립니까? 다 먹고 배부른 썩는 양식으로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들은 아직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그 의를 모르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율법)을 통해 그 하나님의 디카이오쉬네(의)를 알아 진정으로 배부른 자들이 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이다.
광야에서 주리고 목마름! 결국 누가 해결해 주는가? 하나님이다. 인간의 결핍! 그 결핍은 하나님없이 해결이 안되다. 인간의 근본적 결핍은 하나님이다. 그래서 결핍을 경험하게 하는 이도 하나님이다. 내가 이렇게 결핍되어 있으니 당신이 필요해요! 이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고백이다.
시23: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23: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23: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23:6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여호와의 집! 그곳이 성전이다. 이러한 성전을 계시록은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계22:1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계22:2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위하여 있더라
이게 하나님 나라이다. 성전이다. 성전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것이다. 그것이 의로 배부른 것이다.
이러한 복이 중앙교회의 식구들에게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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