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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새벽기도 말씀

마음

by 다바르아마르 2020. 4. 3.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때문이다. 하나님을 어떻게 본다는 것일까?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을 보기 원한다. 그런데 출애굽기에서는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한다(33:20~23).

 

33: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33:21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33:22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33: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제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한다. 누가?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한다. 마음을 비우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일까? 신과 함께라는 영화에 보면 옥황상제가 멋있는 이정재로 나온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렇게 아는 것은 아닐까? 신과 함께라는 영화는 착하게 살아야된다는 것이다. 마음이 착하면 그렇게 이정재같이 멋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씀일까?

 

긍휼한 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마음이 청결한 자도 하나님의 의의 결과이다. 그 결과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본다고 할 때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일까? 33장에 의하면 눈으로 직접 보는 하나님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본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본다라고 할 때 호라오(3708)이라는 단어를 쓴다. 호라오는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보는 것에도 사용되고( 28:7;  28:10;  16:7;  16:23;  8:57;  9:37;  14:9;  6:16; 요일 4:20;  1:7 ), 마음으로 보는 것에도 사용된다. 마음으로 본다는 것은 이해하고'( 8:32;  2:18;  2:8;  2:24), '의식하고'(요삼 1:11). '경험하다'( 3:6;  17:22;  3:36)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호라오는 마음으로 본다는 말이다. 그래서 앞에 마음이 청결한 자가 언급되는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본다는 말이다. 

 

그래서 오늘의 키워드는 마음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마음은 무엇인가? 성경은 계속해서 가장 더럽고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고 말씀한다.

 

( 17:9, 개역)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왜 이렇게 부패하다고 하는 것일까?

 

( 29:13,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아버지 마음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율법을 철저히 지켰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마음과 멀어졌다고 한다. ? 그 이유가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그것을 마음이 불결하다고 그러는 것이다.

 

kaqarov"(2513, 카다로스)

깨끗한 clean, 순결한pure.

 

카다로스는 맑고 깨끗한 물할 때 그런 깨끗함을 뜻한다. 악한 영할 때 아가달토스(169 아가달토스 불결한)란 말을 쓰는데 카다로스의 반대 개념이다. 깨끗한 말씀을 뜻하는 성령은 프뉴마 하기오스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 23:25)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 23:26)

 

유대인들도 정결을 중요시했다. 그런데 그들은 제의적 정결에 중점을 두었다. 그런데 그들의 제의적 정결은 겉의 것만 깨끗하게 한다는 말이다.

 

우선 청결은 겉과 안의 문제이다. 베드로는 보자기 환상을 보는데 환상의 짐승을 부정한 것으로 본다. 그러자 내가 정하게 한 것을 네가 왜 부정하다 하느냐?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겉의 것으로 부정한 것, 정한 것을 판단하였다. 두 마음이다. 겉의 것으로 판단하면 이렇게 두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안을 깨끗게 해야 한다. 즉 안의 것이아닌 겉의 것만 계명으로 지킨 것이다. 진정으로 깨끗해져야 하는 것은 안의 것,  마음이다.

 

즉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이제 부정한 짐승도 정한 짐승으로 보인다. 이방인도 하나님의 눈으로 보이게 되고, 선민의식이 아니라 긍휼의 마음으로 보게 된다.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 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 마음은 무엇일까? 조삼모사라는 말도 있듯이 사람의 마음은 너무나 자주 바뀐다. 그런데 아버지 또한 그런 들쑥날쑥한 마음이란 말인가? 이러한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헬라어에서 사용하는 마음이라는 단어를 알 필요가 있다. '누스(3563)' '카르디아(2588)'이다.

 

kardiva(2588, 카르디아)

마음 heart.

 

카르디아는 느낌, 감정, 기쁨( 2:26;  16:22;  14:17), 고통과 슬픔( 16:6;  14:1; 14:27;  9:2; 고후 2:4;  2:27;  7:54;  21:13;  4:18), 사랑(고후 7:3; 고후 6:11; 1:7), 욕망( 10:1;  24:32), 정욕( 3:14;  5:28;  6:21), 생각과 관련되어 사용된다.

 

예수가 처음 전한 복음의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이다. 처음 전한 복음메시지이기도 하고 예수가 전한 핵심 메시지이기도 하다. 예수가 전한 핵심 메시지는 회개와 천국이다. 산상수훈의 주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회개하라! 로 번역이 되어 있는 메타노에오는 悔改보다는 回心에 가까운 단어이다. 왜냐하면 메타노에오의 어근이 누스(마음)’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悔改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잘못을 뉘우치고() 고친다()는 뜻이다. 기독교에서는 회개를 살아온 삶이 잘못되었음을 자각하여 죄인임을 반성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뜻을 세워 새로운 생활로 들어가는 일로 생각을 한다. 이때의 잘못은 대부분 과거의 잘못을 뜻한다. 그런데 진정한 회개란 진정한 뿌리를 제거함으로서 미래의 잘못까지 제거하는 것이다. 이렇게 진정한 고침이 없다면 잘못이 계속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진정한 뿌리를 제거해야 한다. 즉 틀을 고쳐야 한다. 틀을 고치지 않는 한 그 틀속에 갇힌다. 틀속에 갇히면 계속해서 죄를 범하게 된다.즉 과녁에서 벗어나게 된다.

 

3340  metanoevw   metanoeo {met-an-o-eh'-o}

3326 3539에서 유래;다르게 또는  후에생각하다’, ‘재고하다’(【도덕적으로】가책을느끼다), 뉘우치다 < 3:2; 2:38>. to change one's mind;

 

‘마음을 바꾸다, 마음을 더 좋게 바꾸다, 다르게 생각하다, 회개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메타노에오(μετανοω)는 ‘함께, 후에,뒤에’라는 메타(μετα)와 ‘마음으로 알다, 이해하다, 생각하다, 인지하다’라는 의미의 노에오(3539 noievw)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3539  noievw   noeo {no-eh'-o}

3563에서 유래;마음을 사용하다(관찰하다), (상징적으로)이해하다,마음에 두다, 심사숙고하다, 인지하다, 생각하다 < 15:17; 딤후 2:7>. to exercise the mind;

 

3563  nou'"   nous {nooce}

아마 1097의 어간에서 유래;지능, 마음(하나님 또는 인간의 사고, 감각, 또는 의지에 있어서), 함축적으로의미,이해. 5590과비교 <고전 14:14>남명. thinks;

 

‘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누스’(νους)는 ‘하나님 또는 인간의 사고, 감각, 또는 의지로서의 마음’을 의미한다. ‘누스’(νους)라는 단어가 ‘지각하다, 이해하다, 인지하다, 지식을 갖다, 친밀하게 알다’라는 뜻의 ‘기노스코’(γινσκω)의 어간에서 유래되었다.

 

1097  ginwvskw   ginosko {ghin-oce'-ko}

기본동사의 연장형;(절대형)알다, 매우 다양하게 적용되고, 많은 함축어와 함께(다음 같이 아주 명백하게 표현되지 않는 다른 것과 함께);허락하다, 알게되다, 느끼다, 인식(하다), 알아차리다,분석하다, 말할 수 있다, 확신하다, 이해하다 

< 13:11; 7:1>. to know, learn;

 

따라서 ‘누스’(νους)는 인간의 변화무쌍한 마음이라기 보다는 이해해서 아는 마음을 뜻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파생된 메타노에오(μετανοω)는 단순히 국어사전적 의미인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다’라는 ‘행동양식’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깊이 깨달아 알아버린 마음상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개역성경에서 대부분 ‘마음’이라고 번역한 ‘누스’(νους)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용례를 살펴보면, 변하기 쉬운 인간의 마음을 뜻하는 카르디아와는 다르게 사용됨을 알 수 있다.

 

24:32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kardiva)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24:45이에 그들의 마음(nou'")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마음이 뜨겁다는 것은 감정/열정과 관련된 말이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성경을 깨닫도록 열어 주셨다고 할 때 마음은 누스를 사용하고 있다. 누스는 깨달음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뒤에 성경을 깨닫게 했다는 말이 나온다.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nou'")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kardiva)과 생각(novhma)을 지키시리라

 

 4:7은 누스를 하나님의 평강과 연결하고 있고, 하나님과 연결하고 있다. 그 누스가 카르디아를 지킨다고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누스는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카르디아는 사람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개역]고전 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νους)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기에도 앞에 깨달은이라는 말이 나온다. 깨달은 누스가 중요하다.

 

고전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nou'")과 같은 뜻(gnwvmh)으로 온전히 합하라

 

1106  gnwvmh   gnome {gno'-may}

1097(ginwvskw)에서 유래;인식, (주체가)견해, 혹은 (대상이)결의,  (조언, 동의), 충고, 판단, 마음, 목적, 의지 <고전 1:10;고후 8:10>여명. cognition-the operations of themind;

 

따라서 누스와 앎()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12: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누스)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마음의 새로움(342  ajnakaivnwsi"/위의 것으로 새로워 짐)

 

위의 것으로 새로워진 누스로 변화를 받아~~

 

342  ajnakaivnwsi"   anakainosis  {an-ak-ah'-ee-no-sis}

341에서 유래;재생, 회복 < 12:2>여명. renewal;

 

341  ajnakainovw   anakainoo  {an-ak-ahee-no'-o}

303 2537의 파생어에서 유래;새로이 하다, 새롭게 하다 <고후 4:16>. to renew, renovate;

 

2537  kainov"   kainos {kahee-nos'}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새로운(특히 신선함에 있어), 반면에 3501은 나이와 관계가 있는듯<고후 3:6;5:17;벧후3:13>. new;

 

위의 것으로 새로와진 누스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회심의 의미이다.

 

고전2: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전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전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고전2:16 누가 주의 마음(누스)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누스)을 가졌느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사도바울은 그 마음을 가졌다. 사도바울은 누스와 성령을 연결하여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누스)을 가진 것이다. 카르디아를 가졌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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