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히브리 역본에서 마 5:3에 "가난한 자"와 여기에 "온유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다같이 "아니"이다. 이것은 "온유한자"는 "가난한 자"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아니"는 '가난한, 억압받는, 괴로움 당하는, 비천한, 낮은, 겸손한'을 뜻한다. 그렇다면 1복과 3복의 차이는 무엇인가?
프라위스는 어원상으로는 고트어의 프뤼온(사랑하다), 프리온드스(친구) 등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친밀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친구에게서 예상되는 어떤 성질로 확대된다. 즉 온유하고 친절하고 겸손하다라는 뜻이다. 즉 프라위스는 “친구”와 관련이 되어 있는 단어이다. 이 온유를 이해함에 있어 가장 적절한 방법은 예수께서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가장 정확한 방법이다.
마11: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4239 prau?")하고 겸손(5011 tapeinov")하니 나의 멍에를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11: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 프라위스(온유함)는 예수님이 마태복음11:29에서 말씀하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하셨을 때의 그 온유와 똑같은 단어로 쓰였다. 그가 나귀를 탔을 때도 프라위스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개역에는 겸손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말이다.
[마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그는 겸손(4239 prau?")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이 본문은 구약성경 스가랴 9:9절에서 인용한 것인데 우리가 살펴본 "아니"(6041 ynI[)를 사용하고 있다.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타나니 할 때의 그 겸손도 “아니”이다.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6041 ynI[;)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9: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이때 겸손은 성품의 온순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겸손으로 번역된 "아니"는 문자 그대로 가난이라는 뜻이다. 가난한 메시야이다. 가난한 메시야는 무슨 뜻인가?
이스라엘은 말을 타고 오는 메시야를 대망했다. 말을 탄다는 것은 군사력을 의지하는 왕을 상징한다. 그러나 예수는 나귀를 타고 왔다. 초라하다. 그는 힘있는 군대를 끌고 오지 않았다.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다. 그게 가난한 메시야! 아니의 메시야! 즉 겸손의 메시야! 온유의 메시야이다. 로마를 정복하러 말을 타고 오는 위대한 전사로서 메시야가 아니라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으로서 메시야이다. 다 빼앗기는 메시야이다. 십자가에 끌려간다. 죽음의 메시야이다(사53:1~6).
사53:1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사53:2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53:3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53: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53: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53: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53: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 자신이 온유한 자이다. 온유한 자들의 대표이다. 온유한 자들의 대표! 그가 그 땅을 상속받았다. 모세도 보면 모든 사람보다 온유하다라고 했다.
민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의 온유함도 히브리어 아나브(6035)가 쓰였는데 모두 같은 어원에서 온 말이다. 예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할 때, 분명히 모세를 염두해 두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는 온유하다고 한 것이나 모세가 지면에서 온유함이 가장 뛰어나다고 한 것이나 같은 말이다. 그러면 모세의 경우를 살펴보면 온유의 성경적 개념이 명확해질 것이다.
모세의 어떤 맥락에서 온유하다고 했는지 살펴보자.
민12:1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민12:2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민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사람보다 더하더라
민12:4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세 사람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세 사람이 나아가매
민12:5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부터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민12:6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민12:7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민12:8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민12:8에보면 모세는 다른 선지자와 달리 하나님이 직접 대면하여 명백히 말씀하시는 자였고 여호와의 형상을 보는자라고 묘사한다. 대면하여 말한다는 것을 “출33:11”에는“친구와 같이 이야기”했다고 표현을 한다.
출33:11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그리고 출33:11에는하나님은 모세를 친구같이 여기셨다라고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경우에서는 언제 자신을 온유하다고 하셨는지를 한번 살펴보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할 때, 겸손은 타페이노스(5011)인데 비천한을 뜻하는 단어이다. 가문이 좋지 않고 가난하고 낮은 신분을 뜻하는 단어이다. 단순히 성품이 온화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눅1: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5011 tapeinov") 자를 높이셨고
눅1: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온유하고(프라위스) 마음이 겸손하다(타페이노스 테 카르디아)". 이 두 개의 표현은 대등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순종하셨고, 진정한 순종은 십자가 죽음이다.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것이 사53장과 같은 문맥이다. 그는 거지로, 비천한 신분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이렇게 순종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마11:26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11:27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아들은 온전히 아버지의 계시를 받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을 종이 아닌 친구라 부르신다. 그래서 친구는 죽음을 전제로 한다. 여호와를 보면 죽는다고 했다. 거꾸로 죽어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자기 죽음없이 하나님을 볼 수 없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했다는 말은 따라서 십자가 죽음을 말하고, 자기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했을 때 비천한 자를 높이시어 친구로 여기시는 하나님이다.
요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친구는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아는사람을 뜻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탕자가 파산이 나고, 그래서 애통하고, 다 빼앗겨서 아무도 의지할 수 없을 때! 세상 모두가 그를 버렸을 때! 아무도 친구되어 주지 않을 때, 그때 비로소 아버지가 친구로 다가온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을 알게된다. 그것을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을 했고, 그래서 나는 아버지와 친구이다. 친구이다라는 말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안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경우도 모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뜻이 같아진 것이다. 역시 모세의 경우처럼 친구관계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이다. 그를 벗, 친구라고 불렀다(약2:23).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하나님과 친구가 된 자들(온유함)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의그 수고와 무거운 짐진 것에서 쉬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도 그 수고롭고 무거운 짐을진 이스라엘로 상징되는 그 구스여인, 애굽여인을 아내로 취하여 결혼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 뜻을 모르는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이다.
온유한 자가 즉 하나님의 친구만이 진리로 자유하게 할 수 있다. 나그네는 땅이 없다. 가난한 자이다. 애통한 자이다. 그러나 복이 있다. 하나님의 헤세드가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약속의 땅을 선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8복은 과부, 고아, 나그네에게 주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지금 본문에서 온유한자가 땅을 상속받을 것이라고 하신 그 땅은 그냥 눈으로 보이는 지역의 땅이 아니다. 애굽에서 광야로 불러냄을 받은 자들이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버지와 벗으로 만들어가는 약속을 담은 말씀이다. 아버지의 일하심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모세는 물리적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약속의 땅이 되었다. 그리고 여호수아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
그래서 이스라엘(광야교회)의 광야 시험은 아버지의 친구 만들기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기간이 40이다. 아버지의 뜻을 아는 기간이다. 야곱의 장례 준비기간만 무려 40일이다. 그 친구를 어떻게 만드는가? 만나로 비내린다. 즉 말씀으로 친구를 만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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