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1 예수께서 무리(o[clo")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5: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1절부터 7:29절까지이다. 그런데 이 산상수훈을 강화한 대상이 누구입니까?
마4:25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poluv") 무리(o[clo")가 따르니라
3793 o[clo"(오클로스)백성(의 떼, 무리) 무리, 군중, 떼
2192의 파생어(차량의 뜻)에서 유래;(퍼뜨린 모습으로), 함축적으로‘오합지졸’, 포괄적으로 사람의‘계급’, 비유적으로‘폭도’, 무리, 다수, (사람의)수, 백성, 압력 <마 14:5; 행 8:6>남명. crowd, company;
무리라는 말은 군중을 뜻하는데, 많은 무리, 함축적으로는 오합지졸의 무리를 뜻한다. 예수께서 백성들의 병을 고치자 소문이 나서 오합지졸의 수많은 무리가 따른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보고 예수를 따랐는가? 바로 예수의 표적이다. 예수께서 “그 무리”를 보고 산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산에 올라가서 앉았을 때 누가 나아옵니까? 바로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라고 한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허다한 무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아무나 들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니다. 허다한 무리가 아니고 제자들에게만 들려주신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마태8:1절을 보면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고 했다.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산에서 가르치기를 다하시고 내려오니까 다시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쫓은 것이다.
제자들은 산상수훈도 듣고 비유와 기적도 듣는다. 그러나 허다한 무리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본다. 기적을 볼 때 와~하고 표적만 본다. 신앙에서 이것만(비유와 표적) 보는 것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 애굽에서 표적을 보여주시고 광야에 가서 말씀이 주어진다. 산상수훈을 모르면 기적/비유에 한 눈 팔린다. 산상수훈을 모르면 성경을 내 마음대로 풀게된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네 이렇게 간다. 성경의 기적은 그 의미를 알게 해주기 위함이다.
예를 들어 장님을 눈뜨게 함은 “보게 해 주려구요”라고 대답 밖에 못한다. 이것은 우리 생각일 뿐이다. 의도와 진의를 깨닫지 못한다. 장님이 눈뜨는 것은 표적이다. 눈에 보이는 사역이다. 표적은 실체를 위함이다. 그 실체를 발견하지 못하면 스토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되어 버린다. 과거 수천년 전의 표적이 현재 나에게 실체가 되어야한다. 산상수훈을 모르면 구약도 모르고 기적도 모른다. 신약과 마찬가지로 구약에 모든 표적들은 실체를 향하게 하는 손가락이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을 모르면 구약도 모르게된다.
그러한 (표적을 따르는) 무리들을 멀리하고 예수께서 산으로 올라간다. 그래서 본문을 산상수훈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산으로 올라가셨을까?
그것은 “산” 은중요한 상징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산에 올라가야 들을수 있는 말씀이 산상수훈이다. 산 위에서 듣는 말씀, 제자들이 듣는 말씀, 그러나 산 아래에 내려올 때는 표적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른다.
산에서 내려온 예수님은 그 허다한 무리들앞에서 비유를 말씀하시고 표적을 보이신다. 비유와 표적이 어떤 것들인가 하면 허다한 무리들이 듣고 볼때는그것 자체로 밖에는 볼수가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그 비유와 표적을 그냥 보지 않고 그 의미로 볼수 있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산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뿐이다.
산상수훈을 들은 제자들만이 [비유와 표적]들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볼수 있는 것이다. 이 산상수훈을 제대로 들어야만 예수의 비유와 표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제자들만이 이 산에 올라간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 산상수훈의 진정한 의미를 듣지 못하고 그냥 비유와 표적만 보는 허다한 무리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다. 엉뚱하게 그것을 해석해서 자기들 맘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수많은 비유가 나온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을 모르면 그 비유를 해석할 수 없다. 또한 묵시를 이해할 수도 없다. 또한 구약의 율법의 의미조차 알 수 없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해서 말하자면 예수님은 산에서 허다한 무리 중, 제자들에게 산상수훈을 말씀하시고 그 산에서 내려오셔서 허다한 무리에게 비유와 표적을 나타내신다.
산에 올라가고 내려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시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올까
이 때의 산은 어디겠습니까? 단순히 지리산, 백두산 같은 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이 산은 무엇입니까? 시편 기자는 예루살렘 성전을 보며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산은 많은 경우 성전을 말할 때가 많다.
고대인들은 산을 신전 개념으로 이해했다. 즉 하늘과 땅을 잇는다고 생각한다. 모든 산에 가면 신전이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산당 신앙이 문제가 된다. 산당은 높은 곳이란 뜻이다. 산과 하늘이 맞닿은 것은, 산에 앉았다는 것은 하늘에 오르신 것이란 뜻이다.
에덴 동산도 그래서 성전 개념이다. 성전 중앙이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였다. 성전 중앙에 선악과가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약의 시내산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마태복음은 출애굽의 재현을 그리고 있다. 출애굽을 이해하지 않고 마태복음을 읽을 수 없다. 출애굽은 성경의 모든 기초가 된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성경 중 하나이다. 마1장에 그리스도의 족보가 나온다. 예수의 아버지는 요셉이다.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과 같은 이름이다. 2장에서 동방박사는 왜 헤롯 대왕을 만나야만 했을까요? 왜 이런스토리가 있는 것일까? 2장의 헤롯은 바로 왕과 닮아 있다. 3장의 세례요한은 요단강에서 사역을 한다. 왜 하필 요단강일까? 세례를 받는 장면은 제2의 홍해도하/요단강도하 사건이다. 4장의 예수께서 시험받는 장면은 광야에서 시험받는 이스라엘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 새로운 모세!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이기고 드디어 천국복음을 전파한다.
예수께서 처음으로 전한 메시지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천국복음의 핵심이다. 이 천국복음을 산에서 전파하는 것이다. 새로운 산이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주제는 한 마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이다. 회개하라는 것은 마음(누스)를 바꾸다라는 뜻이다. 즉 그 누스와 함께(메타)하라는 것이다. 그 누스와 연합해라! 하나되라! 그러기 위해 네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바꿔라 그 말이다. 그러면 천국이 가까이 있다(시간/공간).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가치관의 전면적인 방향전환을 요구한다. 그것이 회개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너희는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이렇게 말한다. 즉 회심을말한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기존에 율법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던 제자들에게 완전한 가치관 전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상수훈 말씀은 도전적이며 혁명적인 메시지이다. 산상수훈을 제대로 들으면 회심이 이루어진다. 천국이 온다.
그런데 이 메시지가 어디에서 선포되는가? 산이다. 즉 새로운 성전에서 선포되는 것이다. 시내산을 대신하는 새로운 산이다. 시내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40주야를 금식하며 말씀, 즉 율법을 받는다. 이 날짜가 오순절이다. 원래 오순절은 율법수여일이다. 그리고 신약에서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해서 일어난 사건이 말씀이 깨달아지는 사건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큰 일을 선포한 날이 오순절이다. 이것이 표적의 목적이다. 그런데 기적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기적의 외적 현상에만 관심을 가지고 기적을 쫓는다. 그래서 방언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외적 방언만 쫓는 것이다. 이것이 다 율법이 제대로 풀어지지 않아서 그렇다.
마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왜 산으로 가시는가? 기도하러 간다. 홀로 있기 위해서 산으로 간다. 그 산은 성전이요, 성전 중의 골방인 것이다.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새로운 성전인 산으로 올라간 것이다. 그곳에서 기도한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한 것이다.
산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하나님은 왕이고, 이스라엘은 백성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왕이 보이는 왕을 보냈다. 보냄을 받은 자! 보냄을 받은 그 왕이 백성들에게 좌정했다. 시내산에도 산의 중앙에는 70장로들만 프로셀코마이(가까이 나아가다)한다. 마찬가지로 이제 제자들만이 프로셀코마이한다. 시내산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내려오고(카타바이노) 모세와 70장로들은 올라간다(아나바이노).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율법을 주셨고, 그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받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의 온전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 율법의 진정한 실체는 모르고 표적을 따랐다. 그들은 열심히 종교생활을 했다.그들은 열심히 제사를 드렸다. 그들은 열심히 십일조 드렸다. 그런데도 그들은 죽어있다. 그들은 여전히 애굽에 있는 것이다. 그런 그들을(제자들을) 산으로 데리고 왔다. 출애굽이다. 그리고 이제 광야에 있는 산! 그 산으로 예수께서 올라가셨다. 그렇다면 그의 메시지는 무엇이 될까? 당연히 율법이다. 오해된 율법! 그 율법을 새롭게 해석해준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율법”을 이해하게 된다.
율법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그 실체! 그 왕이 이제 산에 올라갔다. 그리고 앉았다. 그래서 앉으시니(카디조)라는 말이 나온다.
kaqivzw(2523, 카디조)
앉다 sit, 앉게하다cause to sit.
카디조라는 말은 원래 왕에게 해당되는 단어이다.
계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그리고 재판관들이 의자에 앉아 있다.
마19: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그리고 가르치기 위해 앉는다.
마23: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막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눅5: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요8: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이제 예수께서 앉는다. 왕으로서, 심판자로서, 그리고 가르치는 자로서 말이다. 즉 왕인 그리스도가 성전의 보좌의 앉았다. 그리고 새로운 모세로서그가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마5: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가르치면 가르치지 왜 입을 열어 가르친다는 표현을 굳이 쓸까?
입을 열어 가르치다는 히브리어로 알레프와 같은 뜻이다. 이 말은 지금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언어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지금 입을 여는 것이다. 이처럼 아버지는 아들의 입을 열어 가르친다. 말이 말같지 않으면 그건 벙어리이다. 성전이 진리를 말하지 못하면 벙어리이다. 그런데 모세가 얘기한 바로 그 선지자! 참 모세! 하나님 나라의 왕이 이제 새로운 성전! 새로운 산에서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한다. 그때 하늘이 열리는 것이다.
1절에 분사는 2개인데 보고, 앉았다는 말이다. 분사를 쓰는 이유는 주어가 같은데 동사가 여러 개 일 때 사용되는데, 분사는 형용사 역할을 한다. 주어의 행동을 형용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문장의 주 동사는 정동사이다.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바로 이 정동사이다. 그렇다면 주 동사는 무엇인가? 5장 1절에는 주 동사가 2개이다. 아나바이노와 프로셀코마이다. 아나바이노는 올라가는 것이고 프로셀코마이는 다가오는 것이다. 산에 올라가다~할 때 아나바이노를쓴다.
마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ajnabaivnw)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katabaivnw)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3:16에는아나바이노/카타바이노가 동시에 나온다. 아나바이노와 카타바이노가 함께 등장하면 하늘이 열린다.
요1:51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아노이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아나바이노) 내리락(카타바이노) 하는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하늘이 열리자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가?
시내산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곳이다. 모세의 뿔(이마에 뿔)은 영광을 뿔로 상징한 것이다. 당신의 영광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다. 그래서 그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그렇게 시내산은 율법을 통해 아버지의 영광을 체험하는 곳이다. 율법을 통해 진리가 드러나는 것이다.
민11:2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영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영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
여호와께서 70장로에게 영으로 임하니, 그들이 예언을 했다. 이 장면이 신약의 오순절에 그대로 재현된다.
행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러자 사도 베드로가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했다. 그렇게 하늘이 열리면 진리의 영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게 된다.
그것이 세례이다.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왔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물에 잠기는 것은 죽임을 상징하고 물에서 올라오는 것은 새로운 생명! 부활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물에서 올라오니까 즉시 성령이 "카타바이노"했다 라는 말이 나온다. 물에서 올라오니까 하늘이 열린다.
모든 단어는 표적과도 같다. 문자는 표피적이다. 현상적이다. 밖의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을 땅이라 표현해도 되겠다. 그러나 이 땅이 하늘들이 되려면 하늘이 열려야 된다. 즉 진리의 영으로 열려야만 표적의 문자에서 실체를 보게 되는 것이다. 밖에서 안을 보게 된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보이지 않는 하늘이 진짜 하늘이다.
내 보좌는 하늘에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도 하늘에 함께 앉힌 자라고 고백을 한 것이다.
노아의 홍수 사건도 이렇게 세례를 다룬 사건으로서, 네페쉬가 죽고 프뉴마로 새롭게 부활한 노아는 포도원을 창설하고 안식을 취한 것이다. 이러한 영적 진리를 모르면 함의 시각으로 보게 되고, 함의 시각으로 보면 "얼레리 꼴레리"가 된다.그것이 멸해야 할 가나안 7족속이다. 그래서 가나안이 저주를 받게 된다. 가나안의 옛 족속이 반드시 멸절되야 가나안에 성전이 건설되는 것이다.
입을 연다고 할 때 아노이고라는 단어를 쓴다.
마3:16에는아나바이노, 카타바이노, 그리고 이 아노이고라는 단어가 동시에 등장한다. 하늘이 열린다할 때 아노이고를 쓴다.
계5:2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계5:3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계5:4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두루마리를 펴다 할 때 아노이고(ajnoivgw)라는 단어를 쓴다. 그런데 이 책에는 인으로 봉해졌는데 그 인을 떼어내서 펴야지만(아노이고) 책의 내용을 볼 수 있는데 그 책을 아노이고 할 자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경을 읽어도 아노이고 되지 못하면 그것은 심판이 되는 것이다. 즉 말씀의 뜻이 풀어져야 되는데 풀리지가 않는다는 말이다. 성경책은 심판책이 되기도 하고 생명책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오로지 누가 이 책을 아노이고 할 수 있다고 하는가?
계5: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일곱 인을뗀다고 한다. 유대 지파 다윗의 뿌리! 다윗의 자손으로 온 그리스도(마1:17; 롬1:2~4)인 예수를 말하는 것이다. 그 예수님만이 봉함된 일곱인을 열어서 펼 수 있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로만 열수 있다는 말도 된다(요5:39). 그래서 내가 곧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만 말하게 되어 있다. 그 그리스도로만 책을 열 수가 있다.
그런데 오늘날은 신학을 통해서 풀려고 한다. 조직신학, 성경신학, 성경해석학이라는 학문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한 학문만으로는 성경이 열리지 않는다. 그렇게 이해될 것 같으면 굳이 다윗의 뿌리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영적인 말씀을 육신의 눈으로 보고 육신의 생각으로 해석을 하여 설교를 하고 성경도 가르치고 있다. 이 때문에 오늘날 목회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는 죄를 완전히 떠나 보낼 수 없다. 죽은 영혼을 살릴 수 없다. 회심으로 이끌 수 없다. 천국이 가까이에 있지 않다.
다윗의 뿌리가 인을 떼어주지 않으면 성경은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다윗의 뿌리인 예수가 입을 열어 천국복음을 선포하고 있다. 그때 천국이 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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