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은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들에 대한 그림 언어이다. "속히"는 말 그대로 빠른 시간, 짧은 시간이다. 수천 년 후에 일어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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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눅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하시니라
[개역]행 12:7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개역]행 22:18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개역]롬 16: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있을지어다
[개역]딤전 3:14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개역]계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개역]계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개역]계 22: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그리고 기노마이는 장차 일어날 일이라기 보다는 [되어질 일]이다. 일어날 일과 되어질 일은 의미가 상당히 다르다. 일어날 일은 어떤 사건을 떠오르기 쉽고, 되어질 일은 우리 안에서 되어지는 일이다. 사실 이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계시록은 외부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 안에 ‘되어질 일’이다.
1절의 아오리스트 디포넌트 부정사 게네스싸이는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날 단회적 사건이라기 보다는 <결정적이고도 중대한 것>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 결정적인 것이 되어질, 그것도 빠른 시간 안에서 되어질 일이 계시록이다.
계시록 4가지 해석방법(천년 왕국과 적그리스도 해석에 대해)
1.미래주의 - 미래에 적그리스도
2.역사주의 - 자기시대에 적그리스도, 자기중심적 해석(신문주석) : 루터
3.이상주의 - 인류 전체 역사의 원리, 긴박한 예언적 성격 무시, 구체적인 성취 부정, 해석이 없고 적용
4.과거주의 - 1세기 당시에 일어난 과거의 일로 보는 견해 : 반드시 속히 일어날일
터툴리안(145-220),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 알카자, Gary DeMar, Jame B. Jordan,David Chilton, Rushdoony, Peter Leihart, R.C. Sproul. 이동수,송영목.
역설적으로 1세기 당시에는 과거주의 만 존재했고, 역사주의, 미래주의, 이상주의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해석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들의 시대(역사주의), 혹은 다가올 시대(미래주의)에 계시록을 적용한 결과로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학적 다의성의 결과로 계시록을 선악의 싸움으로, 즉 상징적 무시간적으로 보는 견해가 생겼는데 그것이 ‘이상주의’인 것이다.
미래주의와 이상주의자들은 반드시 속히, 때가 가깝다라는 말을 벧후3:8과 연결시켜 해석한다. 그런데 이것이 옳다면, 우리 시점에서 볼 때 요한계시록은 고작 ‘이틀 전’에 기록된 것이 된다. 하지만 요한은 고난에 처해 있는 수신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면 2,000년이 고작 이틀에 불과한 것인가? 이때 "속히"는 말 그대로 "속히"이다. 베드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시간 인식에 관해서 ‘신학적으로 진술’한 것이다. 1=1,000 모두 히브리어 알레프를 가르킨다. 알레프는 숫자로 1, 1,000을 가지고 있다. 1과 1,000이 같다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문맥과 계시록의 문맥은 전혀 다른 문맥이다.
과거주의 외에 다른 해석들은 ‘본문중심’이 아니라 ‘해석자/독자중심’ 해석이다. 지금까지의 계시록 연구는 본문 자체를 구속사적으로 연구하는 점에서 부족했다. 철저하게 본문중심으로 가야 한다. 또한 성경전체의 상징의 일관성에 입각해서 해석해야 한다. 그렇다고 상징주의라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계시록의 내용이 역사속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가 [성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1차 독자에게는 예루살렘 성전 멸망이 예언이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돌아볼 수 있는 사건이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주의를 배격하는 이유는 예언이 1세기에 성취되었다면 현재 우리에게는 무관한 것처럼 생각한다. 계시록을 읽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선지서처럼 읽는 것이다. 선지서가 성취되었다고 현재와 관련이 없는가?
계시록의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인 동시에 성전인 나에게 되어질 일이다. 이렇게 보아야지만 계시록은 바로 ‘나’의 얘기가 된다. 이것은 단순한 적용이 아니다. 바로 ‘나’라는 성전을 말하기 때문이다. 비록 메타포(비유)는 돌성전이지만, 그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성전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메이온(표적)이다.
성전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충분히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계시록 또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낸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가 나라는 성전을 어떻게 완성하며, 또 그 성전에 어떻게 올(엘코마이:안으로 오심)지에 대해 알려줄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복음이다. 성도에게 소망을 주는 기쁜 소식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