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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새벽기도 말씀

산상수훈

by 다바르아마르 2020. 3. 25.

우리는 성경을 구원의 진리, 영생의 진리를 얻고자 읽는다. 성경 66권 중 어디를 읽어야 될까?

어떤 이는 창세기부터 빨리 빨리 계시록까지 강해하는 것을 목숨을 건 사람도 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전체적으로 빨리 빨리 이해시켜야지 뭐하러 한 절 한 절 강해하느냐?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다독을 중요시해서 성경을 녹음기로 틀어놓고 통독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정말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할까? 아니면 제대로 읽는 것이 중요할까?

 

우리는 성경을 다독을 해야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열심히 많이 읽으면 좋다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아무리 많이 읽더라도 그 뜻을 모르고 읽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중요한 것은 성경의 한 구절이라도 제대로 읽어야 그것이 생명의 말씀이 된다. 천국은 겨자씨와 같다. 한 구절이라도 겨자씨가 되면 그 나무는 자란다. 그것이 단초가 되어 어마어마한 나무가 된다. 그런데 아무리 많이 읽더라도 한 구절, 혹은 한 단어도 모르는 수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믿음은 예수라는 대상을 믿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많은 기적을 행했다. 그러므로 그는 신의 아들이다. 그런 예수를 믿어야 그 힘으로 나도 구원을 받는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예수도 내 밖에 있고, 하나님도 내 밖에 있다. 밖에 있는 하나님에게 나의 소원, 신념, 소망, 욕망을 빈다. 그것을 빌 때 예수의 이름으로 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그것은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샤머니즘이라고 하는 것이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의 어떤 대상에게 그 복을 비는 것이 샤머니즘이다.

 

이러한 샤머니즘이 아닌 참된 믿음, 즉 그리스도의 믿음을 소유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물론 성경을 읽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읽어야 한다. 즉 예수께서 하신 말을 본래의 의미로 성경을 읽을 때 성경책이 생명책이 된다. 성경은 수많은 관점으로 읽을 수 있다. 경영자의 눈으로 보면 얼마든지 리더십의 원리를 끌어낼 수 있다. 긍정의 힘으로 보면 얼마든지 긍정의 메시지를 끌어낼 수 있다. 심리학으로 접근하면 얼마든지 심리적 메시지를 끌어낼 수 있다. 도덕책으로 읽으면 얼마든지 윤리강령으로 읽을 수 있다. 특별히 산상수훈이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상수훈을 윤리강령으로 읽는다. 믿는 자들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사실은 그렇게 살지 못하니 늘 죄책감에 시달리며 산다. 그래도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허벅지를 찌르며 산다.

 

성경은 늘 존재에 대해서 말한다. 존재에서 행위가 따라오는 법이다. 사자는 사자의 행위를 하고, 개는 개의 행위를 한다. 왕자는 왕자로 살고 거지는 거지로 산다. 따라서 거지인 사람이 왕자로 회복되지 않는 한 거지로 산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고상한 종교생활을 한다고 해도 근본적 신분이 변하지 않으면 거지로 살게 되어 있다. 다른 말로 수고와 멍에로 얽메여 산다. 즉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면 거지로 사는 것이다.

 

산상수훈이 윤리강령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산상수훈은 영생(구원)으로 인도하는 보화와 같은 강화이다. 산상수훈은 우리에게 참된 믿음과 신앙생활의 본질에 대해 알려 줄 것이다. 참 믿음을 소유한 자! 그리고 그러한 자는 어떻게 살게되는가를 알려줄 것이다.

 

참 믿음은 엄밀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영생을 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가진 믿음이다. 내 믿음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한 말씀을 제대로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성경은 수많은 관점으로 읽을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한 대로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예수의 믿음이 나의 믿음이 될 때,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가 나의 머리가 될 때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이 새로운 삶이요 영생이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나의 머리가 전적으로 교체된다.

 

예수는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다. 이때 단순히 대상으로서 믿으라는 말이 아니라 그가 한 그 말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가장 중요하며, 그 말씀으로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의 진의가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66권의 성경 중 우리는 어디를 집중적으로 읽어야 하는가?

당연히 예수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야 한다. 예수의 육성이 살아 숨쉬는 곳이 어디인가? 바로 4복음서이다. 그런데도 4복음서가 어렵기 때문에 4복음서를 회피한다. 서신서와 4복음서는 형식 자체가 다르다. 서신서는 편지 형태로 되어 있어 서술형이지만 4복음서는 많은 상징성을 포함하고 있다. 서신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예수가 전한 복음을 이해해야만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4복음서 중 어느 부분을 먼저 읽으면 좋을까?

다 다루면 좋겠지만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어디일까? 예수께서 직접 강화한 내용이 중요할 것이다. 복음서는 주로 예수의 [강화와 표적]으로 이루어지고있다. 그런데 표적이라는 것은 이 강화의 의미를 알려주기 위한 그림 언어이다. 즉 그것은 실체가 아니라 구원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기 위한 교육용 언어이다. 그런데 그 메시지는 강화에 담겨있는 것이다. 따라서 강화를 제대로 알아야 표적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산상수훈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림 언어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석, 반석이 된다. 이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지 않는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중 가장 긴 강화가 산상수훈과 다락방 강화이다. 예수님의 강의는 산상수훈(사역 후 첫 설교)과 다락방 강화(죽기 직전)이다. 그래서 흔히 산상수훈을 이른 비, 다락방강화를 늦은 비라고도 묘사한다. 산상수훈은 알파요 다락방 강화는 오메가이다. 다락방 강화 부분은 요한복음 강해를 통해서 다룬 바 있다. 따라서 기초석인 산상수훈을 배운다는 것은 건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는 것과 같다. 그리고 산상수훈을 제대로 배우면 종교적인 멍에에서 해방되는 참된 자유를 누릴 것이다.

 

1장이 시의 형태로 되어 있다. 그리고 언약이라는 가장 중요한 기초석이 있다. 그래서 한 절 한절 세부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그리고 창4장부터는 이야기 단위로 비교적 빨리 진행된다. 왜냐하면 형식이 네러티브이기 때문이다. 시와 이야기는 다른 것이다. 마찬가지로 산상수훈은 이야기가 아니라 강해이다. 그래서 창세기 1장처럼 우리는 한 절 한 절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는 헬라어를 하나씩 하나씩 보게 된다. 그래서 헬라어 공부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산상수훈에 대한 수많은 설교들이 있다. 대부분은 산상수훈을 윤리강령으로 설교하고 있다. 그리고 좀 나은 강해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 개념으로 설교를 한다. 그런데 설명이 부족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비약을 하는 해석을 많이 본다. 특별히 원어로 설교하는 설교자를 보면 비약이 많다. 상징의 지나친 단순화를 통해 억측이 많이 나온다. 그래서 그릇된 강해를 많이 본다.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헬라어로만 지나치게 협소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문맥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문맥은 근접 문맥이 있고, 성경 전체 문맥도 있는 것이다. 원어 하나에만 치우치면 숲은 바라보지 못하고 나무만 볼 수 있다. 그리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나무와 숲을 함께 보아야 한다.

 

산상수훈은 산에서 한 설교이다. 그 산은 새로운 시내산이다. 그 산에서 예수의 육성을 같이 들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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