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으로 오신 예수! 그가 새로운 모세로서 새로운 성전에 좌정하사! 새로운 가르침을 위해 입을 여는 장면을 보았다.
그가 전한 복음은 [회심하라! 천국이 가까이왔다]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은 회심으로 이끌고 결국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가 입을 여는 것은 천국이 열리는 순간인 것이다. 그가 입을 열었다. 천국을 여는 빵빠레이다. 참 성전이신 예수께서 성전인 산을 올라 왕으로서 앉아 입을 열어 처음 하신 말씀을 살펴보자!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그가 처음한 말이 바로 마카리오스(복)이다.
3107 makavrio" makarios {mak-ar'-ee-os}
시형인 makar<마칼>(같은 의미)의 연장형;‘최고의 축복’, 연루된 의미로 ‘행운의’, ‘복된’,축복된, 행복한(-사람) <마5:3;롬 14:22>형. blessed;
복이라고 번역된 마카리오스는 행복이라고 할수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의 사전적 정의는 ‘만족과 기쁨의 상태’이다. 그런데 이러한 만족과 기쁨은 한시적이다.
우리는 새해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인사한다. 그 때 복은 무슨 복을 말하는 걸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인사는 새해에는 좋은 일만 일어나세요! 그런 의미를 담은 것일 것이다. 그런데 좋은 일만 일어나지 않는다. 어떻게 하랴! 그러면 그들의 행복은 금방 흔들린다. 환경이 바뀌면 변하는 만족과 기쁨이다. 자식이 잘 안되면 금방 불행해지는 행복! 사실 그것은 행복이 아니다. 건강을 잃으면 금방 불행해지는 행복!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행복이 아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들이 한자에도 잘 담겨 있다. 복(福)이라는 단어를 보면 음식과 술을 잘 차리고(☞豊) 제사(☞示) 지내 하늘로부터 복을 받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제사 개념이 들어있다. 제사를 잘 드리면 하늘에서 행운을 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런 생각은 현대 기독교인도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생각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모세가 하늘로부터 받은 율법을 철통같이 지켰다. 그들은 문자 하나 하나에 집착하며 율법을 따졌다. 거기에 행복이 있다고 믿었다. 제사를 잘 드리면 복을 받는다는 우리 조상들의 생각이나 유대인의 생각이나 큰 차이가 없다. 이들은 건강해야 되고 부자여야 된다. 한 때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가 유행한 적이 있다. 부자가 되야 행복하다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을 한다.
그런데 예수는 이러한 복! 행복에 대해 전면적인 회심을 요구한다. 예수는 행복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바와 전혀 달랐다. 그것은 그야말로 파격이자 혁명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행복하다! 가난한 자들이여!
행복하다! 가난한 자들이여! 오히려 거꾸로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이 많아야! 건강이 좋아야 행복하다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예수는 그 생각을 뒤짚는다. 가난한 이들이여 행복하다! 복되도다! 왜 가난한 이들이 행복하다고 할까?
오늘 본문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로 번역이 되어 있어 마음이 가난해야 된다. 마음이 가난해야 천국에 들어간다라고 생각을 또 한다. 그래서 8복을 조건과 결과로 본다. 그런데 이것은 대단히 큰 오류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또 마음이 가난해야 된다! 그 마음이 가난한 것을 겸손한 마음! 온유한 마음! 그렇게 또 도덕으로 몰아간다. 마음이 가난해야만 천국에 들어간다고 해서 또 구원의 주체가 인간에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행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자들이여! 가난한 자들에게 그냥 행복을 선언하고 있는 장면이다.
성경에서 가난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4434 ptwcov" ptochos {pto-khos'}
ptosso<프톳소> (‘웅크리다’; 4422와 4098의 대체어와 유사함)에서 유래;‘거지’(‘굽실거리는’), 즉‘빈민’(비록 한정된 의미나 상대적 의미에서 사용되지만 엄격하게는 절대적 의미로 사용, 혹은 공적인 ‘탁발승’을 가르키는 경우에 사용, 반면에 3993은 개인적으로 돈이 없이 궁핍함을 뜻함) <눅 14:13; 계 3:17>형.beggarly, poor humble;
눅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6:20에는 프뉴마라는 말 조차도 없다. 그냥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난해야 천국에 들어간다는말인가? 그렇다면 성경은 무소유를 말하는가? 가난이 복이라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결국 부자가 되는데,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단 말인가? 돈에 대한 욕심으로 따지면 부자도 돈 욕심이 있지만 가난도 오히려 돈에 대한 욕심을 만든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외적 가난이 좋은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가난하다고 무조건 천국이 보장된 것이 아니다.
누가복음은 전체적으로 ‘반전’의 메시지를 주는 것이다. 가난한 자, 주린 자, 핍박을 받는 자들, 그들의 처지가 역전될 것이라는 메시지이다. 마찬가지로 산상수훈의 8복도 상황의 역전이다. 이것을 “위대한 반전”이라고 표현을 하고 싶다. 즉 가난한 자들은 행복하다! 왜? 가난한 자들이 상황 역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9회말 2아웃에 역전승이다. 이것이 위대한 반전이다. 너희 가난한 자들이여 행복하다! 왜? 위대한 반전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위대한 반전이 바로 천국이다. 천국이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너희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침공할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 말이 아니다. 그런 말이 아니고 [가난한 자에게 찾아오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복이 것이다.
프토코스는 “절대적 결핍”을 뜻한다. 프토코스는 거지에게 사용되는 단어이다. 거지들이여! 기뻐하라! 왜? 거지가 왕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탕자도 아버지 집을 나가고 자신이 거지임을 발견한다. 성경에서는 가난한 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마11: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마11: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1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마11: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 말씀은 세례요한이 옥에서 갇혀있을 때 제자를 보내 오실 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대답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바로 이때도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셨는데 이때 말씀하신 가난한자도 바로 "프토코스"라는 말이 쓰였다. 그런 가난한 자를 설명하기 위한 그림이 소경이며 앉은뱅이이며 문둥이이며, 귀머거리며 죽은 자이다. 즉 맹인, 못 걷는 사람, 나병환자, 못 듣는 자, 죽은자가 다 “가난한 자”이다. 이들이 댓구로 연결되어 있다.
소경, 앉은뱅이, 문둥이, 귀머거리, 죽은 자는 구약적 표현으로는 가난한 자, 과부, 고아, 나그네이다. 가난한 자, 과부, 고아, 나그네 이 모두 공통점은 바로 ‘결핍’이다. 이것이 가난이다. 과부에게는 신랑이 결핍되어 있다. 고아에게는 부모가 결핍되어 있다. 나그네에게는 집이 결핍되어 있다. 누가복음에는 그냥 가난한 자라고 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에는 그 결핍을 한번 더 설명해주려고 한 자가 더 들어가 있다. 바로 프뉴마이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자라기 보다는 영으로 결핍된 자이다. 인간의 근본적 결핍이 바로 프뉴마이다. 그 프뉴마를 넘겨주는 기도가 바로 주기도문이기도 하다.
■프뉴마(靈)
4151 pneu'ma pneuma {pnyoo'-mah}
4154에서 유래; 공기의‘흐름’, 즉‘숨’,‘미풍’, 유추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영혼’, 즉 인간의 이성적인‘영’, (함축적으로)‘생동하는 원리’, 정신적‘기질’, 또는(초인간적인 spirit, wind angels;
프뉴마는 히브리어 루아흐에 해당하는 것으로 ‘영’을 뜻한다. 프뉴마는 바람, 호흡을 뜻하기도 하는데 바람, 호흡과 ‘영’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우선 공통점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이다. 보이지 않지만 이것 없이는 사람은 호흡을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지만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이 프뉴마이다. 그러므로 프뉴마는 생명의 근원이다. 프뉴마는 본질이다.
인간의 근본적 결핍이 바로 프뉴마이다. 하나님은 영(프뉴마)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근본적 결핍은 하나님이다. 인간은 아무리 많은 돈 명예 권력을 가져도 결핍된 상태이다. 하나님이 아닌 이상 만족할 수 없다. 행복할 수 없다. 과부, 고아, 나그네가 결핍되어 있듯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없이 살지 못한다. 그 영으로 결핍되어 있는 자들이여! 복되도다! 왜? 그들에게 하나님이 “선물로” “은혜로” 복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가난해지지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탕자의 비유가 이것을 잘 담고 있다. 탕자는 많은 재산을 받아 산다. 부자로 산다. 그런데 그 부도 한시적이어서 가서 탕진해 버린다. 그리고 자신이 거지임을 발견한다. 아~ 아버지 없이 못사는구나! 나는 죽은 자로구나! 회심이다. 회심하고 아버지에게 돌아간다. 본인 스스로 영에 갈망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결핍을 발견하고, 자신의 거지됨을 발견하고 구원을 갈망한 것이다. 탕자가 집 나가고, 자신이 거지이구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 또한 거지에게 임하는 아버지의 은혜에 관한 이야기이다. 탕자는 자신의 거지됨을 발견하고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이야기이다. 탕자가 집을 나섰다. 집을 나가자 거지가 된다. 집을 나가는 것은 거지이다. 그래서 자신의 거지됨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 집을 갈망한다.
이것이 회심이다.
回는 돌아오다. 돌이키다라는 뜻이다. 回는 물을 본떠 만든 상형문자이다. 물 한방울이 떨어지면 물방울이퍼져 나간다. 물방울 떨어진 곳이 中心이다. 물이 일정(一定)한 곳을 중심으로 빙빙 도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 '돌다', 돌아오다'를 뜻함. 즉 중심으로 돌아오다가 回이다. 중심으로 돌아오는 것이 회심이다. 즉 과녁으로 말하자면 과녁의 중심에 화살을 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심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다. 즉 몸이 아닌 心(마음)이다. 회심은 다시 말하지만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중심은 “프뉴마”이다. 우리의 몸은 그 프뉴마로 기동되는 것이다.
이렇게 중심으로 돌아온 자는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하늘의 다스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프뉴마의 다스림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프뉴마의 다스림! 말씀의 다스림! 이것을 아름답게 비유로 설명한 것이 탕자의 비유이다.
■부자
탕자가 집을 떠날 때 부자로 살았다. 성경에서는 바리새인을 부자로 비유한다. 바리새인들은 어떠했습니까?
요9:41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자신의 맹인됨을 인정 안하는 것이 오히려 부자라고 보는 것이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는 자를 소경이라고 하지만…, 성경에서 소경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보이지 않는 그것은 보지 못하는 자이다. 하나님은 소경으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은 분명 소경으로 시작하시는데 자기들은 스스로 다 본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고 하신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나는 소경입니다. 나는 보길 원합니다. 프토코스합니다. 라는 상태가 오히려 복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나는 소경이 아니다. 나는 율법박사이다. 알만큼 다 안다. 난 율법도 다 지켰다. 그러니 내겐 부족한게 없다. 난 부자다! 그래서 행복하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어찌 예수의 말이 들어가겠는가? 그러니 어둠이 빛을 영접하지 않는 것이다.
소경만 그런 것이 아니라 문둥병자도 앉은뱅이도 귀머거리도 마찬가지이다. 다 가난한자. 즉 프토코스하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다. 그렇게 프토코스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자신의 부유함을 나눠주시기 때문에 그들이 바로 진짜 복이 있는 자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인 “복되도다 영으로 결핍된 자들이여”라는 뜻은 프토코스하는 자(소경, 문둥병자. 앉은뱅이, 귀머거리, 죽은자)들에게 침공하는 천국 복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마음이 가난해져야 한다. 혹은 우리는 거지가 되어야한다. 혹은 우리는 진리에 갈급해야 된다. 이런 말씀도 아니다. 인간은 갈급해 하지 않는다. 갈급해 하지 않기 때문에 집을 떠나고 나서야 갈급함을 알게 된다. 이렇게 “조건”으로 가면 안된다. 인간은 태어나서 모두다 “거지”로 살아간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런 “거지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로 “천국”이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선물”이다. “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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