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로고스란 무엇인가?
로고스(3056 lovgo")는 ‘말하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이다. 우리가 말한다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말을 한다는 점에 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바로 인간은 말을 한다는데 있고, 헬라인들은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이성’이라고 불렀다. 그 이성이라는 말도 ‘로고스’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그래서로고스는 ‘합리적인 생각(이성)과 그 생각의 외적 표현인 말’을 뜻한다. 즉 ‘사상과 말’을 함께 나타내는 것’이다.
이 로고스는 우주에 편만한 이치이며, 그것의 씨가 ‘인간의 영혼’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은 우주의 로고스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이치를 터득하여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로고스는 계시의 수단’이다. 로고스가 계시해서 지식을 얻는다. 지식은 헬라철학에서 구원의 수단이므로, 로고스 또한 구원의 수단이기도 하다. 요한은 이러한 로고스 개념을 빌어 복음을 설명한 것이다.
성경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니다. 시대적 배경을 반영하고, 당시 언어를 차용해서 쓰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와 똑같다. 만약 우리가 글을 쓴다면 한국인의 정서가 담겨 있는 언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엘로힘을 ‘하나님’으로 번역한 것도 그 예일 것이다.
구약과 유대교를 모태로 해서 생성된 복음을 헬라인에게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의 언어의 틀을 빌릴 수 밖에 없다.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본인을 계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의 틀을 빌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를 차용했으며, 그들의 문화를 차용했다.
요한은 헬라인들이 익숙한 로고스 사상을 차용했다. 그렇다면 요한은 헬라 철학의 로고스를 말하는 것인가? 그러나 요한이 로고스라는 말을 썼다고 해서 그것이 헬라 철학에서 말하는 로고스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은 구약적 개념을 가지고 로고스를 사용했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 사상을 가지고 있다. 창1장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지으신 것을 그리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수단”이요, 또한 “계시의 수단”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세의 율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잘 연구하고 그 뜻을 터득해서 그 뜻대로 살면 구원을 얻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의 수단’이기도 하다. 정리하면 구약적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은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수단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음받았기에 그 말씀을 담고 있다. 신학적으로는 자연계시와 특별계시라는 말을 쓴다. 따라서 세상 전체가 ‘로고스’로 계시되어 있다.
또 잠언 8장을보면 하나님은 세상을 그의 지혜(로고스)로 창조하셨다고 한다. 이 지혜가 로고스이다. 이 지혜 또한 계시의 수단이다. 이 지혜를 받지 못하면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시14편).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것이라고 한다(잠1:7). 따라서 지혜를 받으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경외하게 된다. 이 지혜가 바로 로고스이며, 그 로고스가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은 초월자이다. 그런데 이 초월자가 어떻게 이 보이는 세상에 관여하는가? 그것이 바로 말씀과 지혜라는 것이다. 유대신학은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를 실체화해서 인격화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남성 명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지혜는 여성 명사 이므로 하나님의 딸이라고 한다. 이것을 유대 신학에서는 그림 언어로 표현한다. 가령 잠언 8장을보면, 지혜가 하나님의 딸로서 하나님의 어좌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것으로 그려진다. 초월의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서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게 한다. 말씀과 지혜, 즉 로고스가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유대신학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의 개념들을 동원하여 초월자 하나님의 내재함을 표현하려고 했다. ‘하나님은 초월자시며 동시에 내재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구약신론의 기본이다. 그렇다면 초월자가 어떻게 이 피조세계에 내재하시고 그것과 관계하시느냐? 바로 자신의 아들인 ‘말씀’을 통해서, 또는 자신의 딸 ‘지혜’를 통해서 이 세상에 자신을 “계시”하시고 “구원”을 하신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는 하나님의 일꾼(agent)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 그래서 로고스는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가 된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머리말은 헬라 언어를 빌어 썼으나 사실은 유대교의 말씀과 지혜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그래서 헬라인들은 이 복음을 들었을 때 쉽게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복음의 놀라운 토착화이다.
헬라인들이 생각하는 로고스와 요한공동체가 생각하는 로고스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태초에 이 로고스가 존재했다. 헬라인들은 로고스를 인격화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말씀에 호가 붙어있다. 정관사가 붙어 있다. 정관사를 붙힘으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로고스와 차별화한다. 즉 정관사를 붙여 그 말씀이다. 호를 붙임으로 말씀을 인격화 하고 있다. 인격화된 로고스가 아르케(시작, 머리, 그리스도) 안에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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