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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새벽기도 말씀

영원히 서게 하는 내 안의 말씀

by 다바르아마르 2020. 3. 14.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영원히 서게 되는 말씀

이사야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서게 되는 교회의 현실을 선포합니다. 육체라는 풀이 마르고, 육체의 영광이라는 꽃이 시들어야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으로 서게 됩니다. “영원히라는 개념을 단순히 시간적으로 끝이 없는 상태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존재적 온전으로 회복된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영원은 시간적으로 끝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존재적으로 온전하게 되는 것을 영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존재됨과 존재의 회복)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약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입니다. “폐하다 카탈뤼오로서 파괴하다, 부수다란 뜻으로 전치사 카타 ~아래로, 풀다, 버리다, 란 뜻인 뤼오의 합성어로 번역하면 구약성경을 아래로 던지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위로 세우기 위해서)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구약 성경을 완성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늘 염두에 두신 것이 기록된 말씀을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26: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12: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13: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성경이 이루어지는 것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경을 이루신다는(응하게 한다) 것은 일차적으로 구약에 기록된 그대로 물리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리적으로 그대로 이루는 것이 진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이루는 것이고 실제로는 그 안에 있는 내용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구약 성경에 수 없이 기록된 내용이 궁극적으로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겠습니까? 말씀이 이루어지는 곳이 교회(성도)입니다. 교회 안에서 그 진리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영원히 서리라고 한 것입니다. “서다 이라고 했습니다. 신부인 교회가 진리로 오롯이 세워져 신랑인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는 그 상태가 말씀이 영원히 서는 것입니다.

 

밖의 말씀 이 말씀이 문자로 기록된 곳이 성경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책은 우리 밖에 기록된 문자입니다. 말씀이 하나님이니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은 밖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밖의 말씀을 아무리 열심히 우리의 본성을 가지고 읽어도 그 말씀은 밖의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영으로 해석되는 내용이 없이 성경을 열심히 읽고, 암송하면 내 밖의 하나님으로만 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열심히 섬긴 자들의 대표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는 밖의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행위를 요구하시는 하나님, 밖의 하나님은 율법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선악과 먹고 태어난 우리가 밖의 말씀, 밖의 하나님을 열심히 문자와 소리로 읽으면(섬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은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이렇게 밖의 하나님을 형상화한 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그 우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 하냐면, 우리로 무엇을 하라와 하지 마라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행위 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쉽게 말해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신이 우상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하라와 하지 마라의 영역이 아니라, 존재됨과 그렇지 않음의 영역입니다. 그러니까 하라와 하지 마라는 내가 주체가 되어 하거나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는 내가 그런 존재로 되는 것이냐 아니냐의 영역입니다. 하라와 하지 마라는 내가 주체가 되는 영역이고, 존재됨의 영역은 내 밖에서 주어지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그 성경의 문자를 해석하는 소리로, 영으로 들으면 그 문자의 내용이 우리 마음에 임하게 됩니다. 그 문자가 소리를 통해 마음에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5: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예수에 대한 증언, 성경 유대교도들의 종교적 열심은 엄청 났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너희가 성경을 연구하고, 살펴보고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과 열정으로 기록된 책인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그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다고 하십니다.(이 성경은 예수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 그런데 40절은 조금 문맥이 맞지 않습니다. 앞 절에서는 성경을 연구한다고 하셨는데, 그리고 성경은 자신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고 있는데, 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는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성경을 연구하고 있을까요?

 

영이요 생명인 그리스도의 말씀 밖에서 들리는 천 마디 방언보다 안에서 들리는 한마디 예언이 그리스도를 보게 합니다. 그래서 강론되는 성경말씀을 듣는 시간과 양이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내 마음에 들리느냐, 안 들리느냐 입니다. 우리가 늘 느끼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마음으로 영으로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교만한 생각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노력을 하고 힘을 써야겠지만 그렇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안한다고 안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내가 그것을 하라와 하지 마라의 것으로 받아 선택하여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땅의 노예의 절망적 현실 아다마 아바드”, 그러니까 땅의 노예로 살고 있는 사람은 이 땅의 인과율의 법칙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더 절망적인 것은 그러하기 때문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은혜의 법칙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땅의 노예로 살고 있는 인류를 대표하여 예로 든 인물이 바로 가인입니다.

 

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아니한 하나님을 향해서 가인은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 합니다. 감정적으로 기분이 나빠서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안색은 파님이고, 변하니는 나팔이란 단어로 떨어지다, 넘어지다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가인의 얼굴이 떨어졌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분노와, 화로 표현된 선악과 먹은 그 존재가 허물과 죄로 죽은 자가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인의 안색이 변한 것은 머리가 떨어진 것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상태, 분리된 상태를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하나님이 가인에게 반문하시면서, 그의 존재됨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말씀하십니다.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선을 행하시길 원하실까요? 여기서 말하는 선은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성취되는 차원으로서의 토브가 아라, ”야타브란 단어입니다. ”야타브 은혜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낯을 들지 나사란 단어입니다. (원문에는 이란 단어도 없습니다.) 나사는 들어올리다, 가지고 가다, 취하다“, 란 동사로 언약을 맺을 때 돌이나, 나무 등을 들고, 세우고, 가지고 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를 번역하면, ”너에게 내가 베풀어준 은혜가 있으면 (언약)세우지 못하겠느냐 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그의 역사는 십자가로 세워지는(나사, 들어 올려지는)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하나님과 십자가로 체결되어 딱 달라붙어 있는 연합으로 한 몸이 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언약이라는 말 자체가 말로 묶는 것입니다. 말은 말씀이고, 말씀은 육신이 되신 예수가 죽어, 영으로 건네주신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가인에게는 십자가로 세워진(나사, 들려진) 은혜 받음의 현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놋 땅에서 유리하고 방황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에게 제외된 영혼의 절망적 상태에 대하여 하나님이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벨의 죽음을 통하여 셋으로 거듭나는 것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죽어서 진리의 영으로 다시 오셔야지만 가인인 우리가 살 수 있는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은 영이요 생명이라

 

레마로 흐르는 복음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그의 머리를 교회에게 건네주시는 것을 통해 로고스의 말씀이 흐르는 레마로 들려지게 되었기 때문에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다마 아바드로 땅의 노예로, 밖의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있는 유대교도들인 우리를 이방인으로 만들기 위해서(유대교도에서 빼내기 위해서) 예수님이 친히 유대교 안에서 죽으시고, 영의 말씀으로, 우리 안으로, 영원으로 세우신 것입니다.(복음은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유대인인 내가 이방인이 되는 것입니다.)

 

 

24: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이러한 성령의 사역으로 교회가 말씀으로 세워지고 있는 것이고, 오고 가는 세대 안에서 하나님의 교회들이 영원히 서는 말씀으로 세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내 속에서 흐르는 레마로 듣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서게 되는 언약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 말씀으로 형상을 만들어 우상으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역사 안에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죄는 우상 숭배 뿐이 없는 것입니다.

 

우상숭배 구약성경에 우상(偶像)”으로 번역될 수 있는 히브리어 단어가 약 15개 정도 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단어가 아차브란 단어인데 이것이 동사로 사용되면 말을 곡해하다로 사용되었습니다.

 

 56:5 그들이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나를 치는 그들의 모든 생각은 사악이라

 

말을 곡해하여 하나님을 치는 자들 하나님이 시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곡해하며가 형상을 만들다란 뜻입니다. 밖에 있는 그 말을 땅에서 필요한 것으로 조작하여 만든다는 뜻입니다. “치는은 때리다가 아니라, 전치사  “~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말을 조작하여(형상으로 만들어)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모든 생각을 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을 악으로 갚는 것입니다. 흔히 기독교 황금률이라는 것이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도 우리가 하나님을(율법과 선지자, 말씀) 어떻게 이해하고 대접하느냐에 따라 그 하나님의 대접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내 밖의 우상으로 섬기면 하나님으로부터 우상의 대접을 받고, 내 안에 진리로 연합되면 그 연합의 대접 즉 열매로 영원히 서게 되는 말씀이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대접하고 있습니까? 내 안에 영(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을 진리로 대접하여 영원으로 서게 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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