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바로 앞 사건을 보면 예수께서 부활 후에 제자들 가운데 오셨을 때 도마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24절을 이렇게 쓰는 겁니다.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그런데 원문의 뜻을 살펴서 보면 ‘그 열둘에서(제자라는 말이 없음) 떨어진 하나, 그를 디두모라고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열둘은 아들을 의미합니다. 아들에서 떨어져 나간 자, 열둘이 되지 못한 즉 아들이 되지 못한 자를 말합니다. 아들이란 성경에서 진리가 된 상태를 말하니까, 이 말은 진리가 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디두모가 아직 율법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히브리어로 ‘아브’라고 합니다. 파자하면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죠. 그러니까 성전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집은 성전 밖에 없습니다. 아들은 ‘벤’이라고 하고 아들의 완성이 ‘벤야민’입니다. 벤은 아들이라는 뜻이고 야민은 오른쪽을 의미하니까 벤야민은 ‘오른편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게 아들의 완성이지요. 요셉의 아들 중에서 장자 ‘므낫세’는 야곱의 왼편에 세우고 차자 ‘에브라임’은 야곱의 오른편에 세웁니다. ‘므낫세’라는 이름은 죽는다는 뜻이고, ‘에브라임’은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뜻입니다. 즉 므낫세는 예수를 상징하고 에브라임은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오신 예수(므낫세)는 죽고 나중으로 오신 그리스도(에브라임)는 열매를 많이 맺는다, 그런 의미입니다. ‘오른편의 아들’(벤야민)이 아들의 완성이니까, 예수가 죽고 그리스도(진리)로 성도 안에 넘겨져서 진리가 성도 안에 완성이 되면 그걸 아들의 완성이라고 합니다.
즉 아들이 완성되어 내 안에 열매를 맺으면 그걸 ‘아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다’라는 말이 나오죠? 아버지(아브:하나님의 집)는 성전, 그 성전이 아들로 완성이 됩니다. 그러려면 예수는 죽고 그리스도로 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 안에 그 아들이 완성이 되면 곧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다’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럼 성도는 아버지도 되고 아들도 된다는 뜻입니다. 그럼 그 열둘에서 떨어진 하나, 열둘이라는 아들의 완성 곧 진리가 되지 못한 디두모, 곧 도마라는 뜻입니다. 이 도마라는 이름이 ‘짝, 쌍둥이’ 그런 의미거든요. ‘짝이 되지 못한 쌍둥이’라는 뜻인 거죠. 짝이라는 말은 기필코 짝을 만나야만 한다는 것인데 짝이 없어요. 율법의 짝이 진리죠? 율법은 진리를 만나지 못한 반쪽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다’라고 합니다. 원문으로 보면 우리가 그 주를(호 퀴리오스) 보았다(호라오). ‘주는 그리스도시오’ 베드로가 고백했죠? 그러니까 ‘주’라는 말은 ‘그리스도’라고 번역을 해야 합니다. 다시 번역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보았다’ 즉 ‘만났다’가 아니라 ‘보았다’라고 합니다. 이 말이 ‘호라오’인데, 이 말은 보이는 것을 통해 그 너머의 진리를 보았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진리가 되었다, 그런 뜻인 거죠. 이걸 예수께서 19절 말씀에 ‘그들 가운데 섰다(히스테미)’ 헬라어로 ‘히스테미’는 진리로 똑바로 서다는 뜻입니다. 즉 밖의 것이 안의 것으로 세워질 때, 밖에 보이는 율법이 내 안의 진리로 읽혀질 때(진리가 될 때)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성경에서 이 가운데라고 한 ‘메소스’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영역이기도 하고 사람의 영역이기도 한 ‘가운데’라는 의미거든요? 거기가 어디죠? 성전입니다. 율법입니다. 하나님이 주셨지만 우리의 관념과 이성을 차용하여 주셨으니까 하나님과 사람의 가운데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치 예수님이 제자들 가운데서 섰다는 뉘앙스로 번역이 됐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께서는 죽었다가 부활했기 때문에 그 분이 ‘진리’인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그 가운데인 성전을 진리로 똑바로 세웠다, 그런 말입니다. 제자들이 주(퀴리오스)를 봤다고 합니다. 즉 주는 그리스도라고 해석하고 그리스도는 성령이고 성령은 ‘깨끗한 말’이고 그건 진리니까 이제 부활하신 예수를 진리로 ‘호라오’했다는 겁니다. 그들이 성령을 보았습니다. 즉 그 진리를 보았다, 깨달았다, 밖의 것이 안의 것이 되었다, 율법이 진리가 되었다. 그겁니다. 아들의 완성이죠? 그러자 도마가 뭐라고 하죠?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 그런데 지금 주님이 그런 자국들이 있을까요? 이게 전부 이 땅의 개념으로, 육신의 개념으로 해석을 한 겁니다.
원문으로는 그런 뜻이 전혀 아닙니다. 손이 뭐죠? 성경에서 손이란 의미는 손으로 만든 어떤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손으로 작업해서 만든 어떤 것, 그래서 우리에게 넘겨주신 것이 뭐죠? 율법입니다. 그 율법이 다시 성전이 되죠? 그래서 성전도 ‘새기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성전은 ‘파다, 새기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굴’을 파서 만들죠? 또한 ‘무덤’ 그리고 ‘우물’ 이런 것들이 전부 파서 만들거든요. 그건 ‘새기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전부 성전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우물, 무덤, 굴 이런 것들이 나오는 이유는 바로 성전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못 자국’이란 것도 ‘뾰족한 것으로 새기다. 음각을 내다’입니다. 역시 성전을 의미하고 ‘옆구리’도 ‘옆’이라는 의미거든요. 옆이 뭐죠? ‘하마르티아’ 죄라는 단어가 ‘옆으로 빗나가다. 과녁을 빗나가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옆에 뭐가 있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있고 그 옆에 비슷한 것을 만들어서 하나님이 그걸로, 옆에 있는 것으로 진리를 알게 하셨어요. 그게 ‘성전’입니다. ‘율법’이죠. 그러니까 ‘옆구리’라는 것도 성전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옆구리에 창으로 뚫리시죠? 진리 옆에 있는 것인 율법이 완전히 파괴되는 그림입니다. 예수가 보이는 율법이시니까 그 율법을 파괴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거기서 물과 피가 나왔다고 합니다. 물과 피는 뭐죠? 구약은 피의 역사입니다. 희생제사입니다. 예수는 물의 역사를 하러 오셨습니다. 그 구약의 율법, 피를 말씀으로 전하러 오신 것이죠. 그렇지만 그 말씀이 다시 오시는 성령으로 완전히 우리 안에 완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물과 피는 전부 쏟아서 없어져야 하는 것이죠. 율법이 예수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자 그 율법이 진리로 변하여 생명을 주는 원리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것이 언약의 기둥(십자가)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나서 8이라는 날이 또 옵니다. 일곱의 완성인 8이죠. 언약의 완성, 즉 ‘성전으로 시작한 하나님이 그 진리의 말씀을 넘겨주어서 완성하다’(베레쉬트) 그게 언약이고 약속입니다. 그것이 언약의 기둥에서 7로 완성이 됩니다. ‘다 이루었다’ 그 7(언약)을 8(완성)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안식(7) 후 첫 날(8)에 부활하시는 겁니다. 우리에게 그걸 보여주시기 위해 치밀하게 맞추신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그 가운데를 세웠다’ 즉 그 율법을 진리로 똑바로 세웠다(히스테미). 이렇게 쓰는 겁니다. 이게 ‘너희 안의 평강이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내밀어’ 여기서 손가락이라고 한 단어는 ‘열(10)’이라는 뜻에서 왔습니다. 손가락이 몇 개죠? 열 개입니다. 성경에서 열이란 율법을 말합니다. 모세에게 계명의 열로 주셨습니다. 즉 열은 율법을 말합니다. 다시 번역하면 ‘너의 율법을 가지고 와라’ 이겁니다. 그리고 ‘내밀다’는 단어가 ‘성전의 제단에 제물을 짊어지고 간다’ 그런 의미란 말이죠. ‘짊어진다. 인도한다. 데려가다’ 무엇으로 성전 제물을 삼아 제단에 데려가죠? 하나님께 드릴 선물로 데려갑니다. 그런 의미입니다. 그 제물이 뭘 상징하죠? 예수죠? 예수의 육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를 희생제물이라고 하거든요? 그러면 ‘예수’라는 제물은 우리 보러 다시 가져오라고 하는 선물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 대가없이 거저, 은혜로 받으라고 주시는 선물인가요? 후자이죠? 즉 예수라는 제물을 죽이고(죽이라고 준 것이니까) 죽고 다시 오시는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는 겁니다. 진리를 받으라는 거죠. 그런데 왜 다시 제단에 가져가죠?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그 선물을 다시 하나님께로 가져가서 보이콧한 겁니다. 돌려드린 것이죠. 거부한 겁니다. 이걸 지금 우리가 전부 예배라고 하고 있는 겁니다. 그 희생제물이 죽어야 진리를 깨닫게 되는 건데, 즉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잘 받는 것인데 다시 선물을 가져와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겁니다. 계속 그 선물을 보이콧해요. 거절합니다. 그 의미를 모르니 계속 하나님의 선물을 거절해 버리는 것이죠. 율법에서 제사하라고 하니까 그 뜻을 모르고 계속 행위로 해 버립니다. 제물을 바치라는 것은 바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게 하나라는 말입니다. 하나로 읽어내야 해요. 하나님의 개념은 우리의 것과 완전히 반대입니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예수께서 도마에게 너의 그 율법으로 하나님께 열심히 드리는 선물, 그거 가져와봐라. 네가 가진 그 율법, 너의 이 아래 개념으로 가진 성전(율법)을 가져다가 열심과 정성으로 하나님께 드려봐라. 그리고 ‘나의 그 손을 보고’ 여기서 지금 예수께서 하신 말씀 ‘나의 그 손’이란 예수라는 그 율법을 말하는 것이죠? 손이 열이라는 율법(성전)을 말한단 말입니다. 지금 예수라는 성전, 율법은 부활하신 후니까 완전히 진리로 깨닫게 되는 ‘성전’입니다. 그러니까 ‘그 진리라는, 나라는 성전을 보고’ 그 다음이 ‘너의 그 손, 즉 너의 그 율법, 너의 그 성전을 제사를 드리듯이, 받으라는 선물을 다시 하나님께 가져와서 그 선물을 다시 하나님께 돌려주는 그 율법을 가져와서’ 내 옆구리에 던져라, 버려라. 내 옆에 던져라, 옆이 뭐라고요? 율법. 그 율법은 창으로 뚫려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정리해 보면, ‘나’라는 진리를 보고 ‘너’가 가지고 있는 율법을 가져와라. 그리고 내 옆에 던져버려. 완전히 파괴해 버려. 그리고 진리로 바꿔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원어적으로는 ‘믿음이 아닌 상태가 되지 말고 믿음이라는 상태가 되어라’ 뭐가 믿음이죠? 진리를 알지 못하고 성전에 가서 희생제물을 드리고 있으면 그건 믿음이 되지 못한 겁니다. 율법이죠. 율법에서 하나님의 진짜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그건 믿음이 아닌 겁니다. 그러나 율법을 제대로 깨닫고 선물로 받으라는 그 제물을 제대로 받으면, 눈에 보이는 예수를 죽이고(부정하고) 그리스도 곧 성령 말씀진리로 내 안의 것으로 받으면 그게 믿음이라는 상태, 즉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되라고 하시는 것이지 열심히 내 열정으로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이 29절을 설명하려는 것인데,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원어의 의미가 다릅니다. 여기서 ‘나를 봤다’ 이게 ‘호라오’입니다. 맞죠? 율법 안에 숨겨져 있는 진리를 ‘호라오’(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해야 그것이 ‘믿는’ 것입니다. 그럼 ‘보지(에이돈-성전을 보다) 못하고 믿는 것’이 뭐죠? 예수가 죽고 예수라는 율법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보이는 성전(예수의 육체)이 없어지니 방해거리가 없어지죠? 그게 보지 못하는 겁니다. 예수를 이제 볼 수가 없잖아요. 그럼 뭐가 오시죠?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그리스도가 진리를 내 안에 가득 채우십니다. 율법과 진리를 하나로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믿는 자들은 복되다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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