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메 노미조로 시작된다.
3543 nomivzw nomizo {nom-id'-zo}
3551에서 유래; 아마‘법(용도)에 따라 행하다’, 즉‘익숙하다’(수동태; 평상이 되다), 포괄적으로‘생각하다’, 또는‘간주하다’상상하다, 생각하다, 익숙하다 <마 5:17; 행7:25>동. to deem;
3551 novmo" nomos {nom'-os}
기본어 nemo<네모>(분배하다, 특히 짐승에게 먹이를 주거나 방목하다)에서 유래;‘율법’(규정된‘관습’의 개념으로), 일반적으로‘법규’(모세의【책 포함】, 역시복음의), 또는(상징적으로)원리 <마 5:17; 행6:13; 롬3:19>남명. law;
노미조는 노모스(관습, 관례, 법, 율법)에서 유래했는데, 생각하다라는 뜻이다. 노미조의 용례를 보면 대부분 잘못된 생각으로 쓰이고 있다. 생각은 생각인데 잘못된생각, 즉 율법적 생각, 관습적 생각을 뜻한다. 사람은 누구나 지금까지 해오던 것(익숙한 것)을 그대로 계속하려는 성향이 있다. 그게 노미조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율법과 선지자는 무엇을 두고 하신 말씀일까? 성경에서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면 곧 구약의 성경말씀을 뜻한다(눅24:27, 눅24:44~45). 즉 앞에서 예수께서 쭉 말씀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그들이 늘 듣던 말씀과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마7:28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1605 ejkplhvssw ekplesso {ek-place'-so}
1537과 4141에서 유래;깜짝놀라서 ‘충돌하다’, 놀라게 하다, 놀라다 <마 7:28>동. to be amazed;
이 말씀은 제자들이 산상수훈을 듣고 은혜로운 말씀이라 감동을 먹었다는 것이 아니다. 심하게 놀란 것을 말하는데, 놀라움을 넘어 경악하고, 놀라서 충격을 받는 것이다. 동사 에크플렛소는 에크(ejk, ejx, 1537)와 플렛소(plhvssw, 4141: 때리다, 치다)에서 유래했는데, 놀라서 그들의 머리를 강타하는 것이다. 왜?
마7:29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율법과 그 선지자를 파괴한다고 생각한다.
눅16:29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눅16:30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눅16:31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부자가 죽어 음부에서 고통당하면서 나사로를 품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당부를 하자 그 답으로 아브라함이 했던 말이다. 부자가 자신의 다섯 형제를 걱정하자 아브라함은 저희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까 그들에게 들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자 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저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분명히 다시 설명하죠. 만약에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않는다면 비록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는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않는다.
여러분 이말이 무슨 말입니까? 구약의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서 듣지 아니하는 자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자 그리스도가 저희에게 찾아가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도 이미 구약이라는 율법과 선지자로 구원의 말씀을 부족함 없이 다 하셨다는 것이다. 그 구약의 말씀을 가지고 믿지 못하는 자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 그리스도가 눈앞에 나타나도 믿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즉 구약에도 이미 그리스도가 있다는 말이다. 구약에도 이미 그리스도가 있는데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부자같은 신세가 된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그 말씀들을 어떻게 받았습니까? 전부 지켜야할 율례와 규범으로 껍데기로만 받은 것이다. 말하자면 표적으로만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제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와서 실체를 알려주니까 그들이 '당신은 율법과 선지자를 파괴하러 왔다' 이렇게 (잘못, 율법적으로) 생각하는것이다. 요한복음의 예를 보자.
요2:1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이 말을 듣는 유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당신은 율법의 상징인 성전을 파괴한단 말이요?
요2:20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요2:21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분명히 예수는 이 성전을 헐라고 했다. 그것은 율법적 성전이고, 새로 세우겠다는 성전은 새로운 성전을 말한 것이다. 그들의 입장으로볼 때 이것은 율법파괴 발언이다.
저자는 율법을 파괴하러 온 바알세블이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이다. “폐하러 온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내 말을 들으면 율법을 파괴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온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모든 율법을 지켰다는 말일까? 우리가 흔히 듣던대로 예수께서 모든 율법을 지켜서 우리에게 전가시켜주었는가? 넘겨주었는가? 구약 율법이 613개라고 한다. 그 모든 율례들을 예수께서 다 지켜냈는가? 그는 가장 중요한 안식일부터 범했다. 율법에 의하면 월경 후의 정결예식까지 있다. 남자인 그리스도가 그런 것까지 다 지켰다는 말일까? 모든 율법의 세목을 다 지켰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율법은 그리스도를 말한다는것이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옛 성전을 헐고 새 성전을 짓겠다는 것이다. 어떻게?
예수님이 기둥에서 완전히 죽으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이다. 지금도 성전을 헐라! 건물교회를 헐라! 그러면 난리 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게 노미조이다.
노미조하는 너희들, 율법적인 생각이 파괴되어야만 율법이 완성되는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이 율법을 파괴하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거꾸로 말하면 예수의 말씀이 겉으로 보면 파괴하는 것으로 보였다는 말이다. 그만큼 충격적인 말씀이라는 것이다.
신약의 서신서들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복음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끊임없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교회들을 책망하는 말씀이 대부분이다. 복음서에는 예수의 진리의 말씀이 잘 담겨있다. 그런데 여러 교회들이 계속 그 진리에서 떠나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니까 그것을 바로잡고 책망하는 말씀들이 바울의 편지들이다. 그들이 진리가운데 잘 살고 있으면 그런 편지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새성전임에도 여전히 율법적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육신적 본능, 즉 노미조하는 본성이 있는 것이다.
심지어 베드로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그렇게 성령을 받고 복음의 전도자가 되었지만 사도 바울에게 언젠가 책망을 받는 일이 있었죠?
갈2:12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갈2:13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갈2:14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그러니 우리는 오죽하겠습니까? 여전히 우리는 율법적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성향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것이다.
4137 plhrovw pleroo {play-ro'-o}
4134에서 유래;‘가득차게 하다’, 즉(문자적으로; 그물에)‘꽉 채우다’(웅더이를)‘평평하게 하다’, ㄸH는상징적으로(감화, 영향을)‘주다’,‘만족하다’(직무를)‘수행하다’(기관과 임무를)‘마치다’,(예언을)‘확증하다’, 성취하다, 완성하다, 만기되다, 공급하다 <마 2:15; 요 12:3; 골2:10>동. tofill up, to fulfill, complete;
율법을 완전하게 하다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 플레로오이다. 이 플레로우에서 온 말이 플레로마이다.
롬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사랑은 율법의 완성(플레로마)이니라
예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엘코마이 했다고 하는데 그 완성은 “사랑”이라고 한다.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 완성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게 완성이다. 즉 율법의 완성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마22: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마22: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첫째가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가 이웃 사랑이라는 말이 아니라 둘째도 이와 같으니, 똑같다는 말이다. 이게 더 큰 계명, 이게 작은 계명이 아니라 같은 이야기다라는 뜻이다. 40절에 보면 강령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정확하게 번역하면 매달린다라는 뜻이다. 이 계명 안에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이 매달린다라는 뜻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을 나무라 생각해보자! 사랑나무에 에 모든 계명을 못박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두계명을 세우면 구약, 모든 율법과 선지자가 이렇게 쭉 따라 올라온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도 하나로 말하는데 결국 이웃사랑이다. 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그래서 보이는 이웃을 준 것이다. 그 이웃이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다.
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계명은 우리는 하나님 사랑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 그 덕분에 이웃사랑하는 것이다. 그 아들 덕분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 아들이 하나의 씨가 되어 하나님 나라로 자라가는 것이다. 그 하나의 씨로 인해서 입맛이 바뀐다. 그 아들로 인하여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사랑은 내리 사랑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 그래서 우리가 아들을 가지고, 또 그 아들이 사랑하게 된다.
율법의 목적은 아들낳는 것이다. 그 아들을 내 안에 가질 때 비로소 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몸을 불살라 남을 구제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세상에서 정의하는 사랑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또 하나의 율법이 된다. 사랑은 그리스도 자체이다. 그리스도가 사랑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씨이다. 그 씨가 내안에 있으면 그로 인해 내가 사랑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담고 있는 소금이며 빛이다. 빛을 가진 자는 빛을 비출 뿐이다.그리스도를 가진 자는 그리스도를 비춘다.
헌금! 십일조! 구제! 봉사! 기도! 이런 것들은 외형적인 제의 의식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법을 어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 종교의 본질은 그런 제의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다”라고 온 몸으로 항변한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외형적인것을 부정해보라! 난리난다. 지금도 그게 본질이 아니야! 사랑이다. 그러면 난리난다. 예수께서 싸운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또다시 옛것으로 건축하려고 한다. 그런 자들이 보기에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처럼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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