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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새벽기도 말씀

* 양자의 영*이 아닌 *아들의 영*

by 다바르아마르 2020. 1. 9.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이 말씀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아들의 영이 아닌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독생자는 예수님 한 분 뿐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아들은 예수님 한 분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양자라는 것이다. 자식이 없는 집안에 양자로 들어간 자가 양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른다. 그러나 양자로 들어간 자식이 양아버지를 아무리 잘 섬기며 오랜 세월동안 아버지라 불러도 양아버지는 양아버지일 뿐이지 절대로 친아버지가 될 수 없다. 아무리 친해도 씨로 낳은 친아들, 친부모만큼 가까울 수 없다.
 
그런데 원문을 보면, 양자의 영은 프뉴마 휘오데시아스라는 단어인데 양자는 휘오스라는 단어와 티데미라는 단어의 합성어로 “아들이 된”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양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는 자”이다. 누구를 말하는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따라서 양자의 영이 아니라 아들의 영, 즉 그리스도의 영이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아들이 된다는 것은 성경의 한결같은 진술이다. 그리고 근접 문맥에서도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기술하고 있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아들이 되어 아버지로 부른다. 그래서 본문은 “아들의 영”을 받았으므로 라고 단순하게 번역하면 된다.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에베소서 본문의 아들도 동일한 휘오데시아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이 본문은 그럼 왜 양자로 번역을 하지 않았을까? 왜 어떤 곳은 양자로, 왜 어떤 곳에는 아들로 번역을 해야 하는가? 무슨 근거로? 헬라문화에서 양자 문화가 있었다. 그리고 단어에 그런 뜻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기자는 그 문자를 빌려 썼기 때문에 아들 개념으로 쓴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번역한 사람들이 헬라 단어 개념으로 번역했던 것 같다.
 
성경의 큰 그림에서 보자!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이 있고, 양자가 있겠는가? 모두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겸손을 과장하여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존재들이다. 하나님은 아들들 안에서 오늘도 사시며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며 그것을 이루어 가신다.

 

신성의 충만함 바로 그것이 내안에 사시는 아들의 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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