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하늘의 입으로 가르치는 말씀(마5:1,2)
마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1 ιδων δε τους οχλους ανεβη εις το ορος και καθισαντος αυτου προσηλθον
이돈 데 투스 오클루스 아네베 에이스 토 호로스 카이 카디산토스 아우투 프로셀산
αυτω οι μαθηται αυτου
아우토 호이 마데타이 아우투
2 και ανοιξας το στομα αυτου εδιδασκεν αυτους λεγων
카이 아노익사스 토 스토마 아우투 에디다스켄 아우투스 레곤
마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ιδων δε τους οχλους ανεβη εις το ορος και καθισαντος αυτου προσηλθον
αυτω οι μαθηται αυτου
이돈 데 투스 오클루스 아네베 에이스 토 호로스 카이 카디산토스 아우투 프로셀산 아우토 호이 마데타이 아우투
1절 직역)
예수님이 그 무리들을(오클루스) 보시고(이돈) 올라가셨다(아네베) 그 산으로(에이스 토 호로스)
그리고 앉으셨다(카디산토스) 그의 제자들이(마데타이) 그에게 나아왔다
무리를 보시고 산으로 올라가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많은 무리들은 바로 앞장(4장)까지 그들의 눈으로 보았던 이적과 기적을 보면서 큰 기대를 하며 따라갔습니다.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예수님은 마음속으로 “너희들이 보았던 이런 이적과 기적의 내용이 바로 지금 내가 말을 하고자 하는 이것이다(산상수훈)”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적을 보며 쫓아갔던 군중들은 이적과 기적의 껍데기만 보고, 그것에 매여 있어서, 그 안에 있는 내용은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산상수훈을 문자의 껍데기로만 보면 그 율법에 매여서 그 진의를(예수의 십자가)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많은 군중이 쫓아다님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을 쫓아 다녔던 “군중”을 헬라어로 “오클로스”(무리) 라고 합니다. “오클로스”는 “군중”, 주위를 돌아다니거나 밀어붙이는 “많은 사람들” “무리” “몰려다니는 떼” 혹은 제한된 소수집단과 대조되는 “대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 기간 동안 이렇게 많은 무리를 끌고 다니셨습니다.
마 4: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무리가] 좇으니라
마 9:33 귀신이 쫓겨나고 벙어리가 말하거늘 [무리가]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 하되
마 13: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36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수많은 이적을 보면서도
복음서에서 무리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정적인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그들은 수많은 이적과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쫓아갔고,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직접 보고, 그분이 행하시는 기적으로 물고기와 떡도 먹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유난히 진리의 관점에서는 배타적이셨습니다. 말씀을 하실 때도 비유로 하심으로 그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뉘게 하셨습니다. 군중들에게 있어서 더 큰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지하고 유기된(버려진) 자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마27:15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대중적인 것이 진리인가?
우리 중에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배우고 있는 이 복음이 진리라면, 이 복음과 대치되는 내용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이냐? 우리가 듣는 이 말이 진리라면 다른 목사들이 하는 말들은 거짓이냐? 그렇게 많은 목사와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있는데, 그 많은 사람들은 정말 잘못되었는가? 이렇게 반문하기도 합니다.
대중성과 종교성
예수님 당대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보편적으로 행하는 신앙의 특징은 자신들이 눈으로 보고, 감정으로 느끼고, 혹은 어떤 종교성에 대한 자극으로 교회를 다니고 종교형식에 열심을 내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인간 보편의 종교적 욕망
불교도들이 자신들의 종교형식에 헌신하는 것과 가톨릭교도들이 그렇게 하는 것과,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종교적 형식에 헌신하는 모습은 모두 똑 같다는 것입니다. 내 밖에 있는 그 신에게 헌신한다고 하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의 욕망으로 만들어낸 하나님, 하느님, 부처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는다고 하는 그 신은 어디에서 나온 신입니까? 자신들의 종교성, 종교적 욕망, 삶의 욕망, 천국과 지옥에 대한 욕망에서 나온 신입니다.
“대중”들이 믿고 있는 예수!
이것이 “무리”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적인 열망, 말씀에 대한 사모함보다는 종교적인 형식으로 종교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그렇게 많은 설교와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이해할 수 없는 비유로 들었기 때문에 말씀의 내용과는 상관없는 종교성과 종교적인 열심에 매여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는 그렇게 군중으로 살고 있는 자들이 진리의 말씀에 낚여져서 군중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홀로 독대하는 자리로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군중에서 제자로
예수님은 많은 군중들을 보셨습니다. 그런데 입을 열어 가르치신 사람들은 그 많은 군중이 아니라, 그 “군중들 안에서” 앞으로 나아온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기적을 체험해도 그 이적의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하면 그가 본 이적과 기적은 그의 신앙에 도움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합니다. 수많은 기도 응답과 이적과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의 마음이 굳어져 배교하는 경우들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보아왔습니다.
듣고 있다고 다 듣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그 말씀을 감추어진 비유로 듣습니다. 듣고 있다고 다 듣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듣는 것 이상으로 그 말씀이 들려야 합니다. 내가 말씀을 듣는 차원 정도가 아니라, 그 말씀이 나를 장악하는 차원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말씀을 잘 듣고 공부하고 깨닫는 차원이 아니라, 그 말씀이 나를 파헤치고, 나를 보게 하고 나를 강해하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현대 기독교의 가장 끔찍한 현실
현대 기독교의 가장 끔찍한 문제는 목사나 성도 모두 복음의 진리와 상관없이 종교 생활로 진리의 생명(지적인 목마름)을 치장하고 있습니다. 많이들 교회에 출석한다고 하지만, 그들 중에 어떤 분들은 그렇게 수많은 예배와 설교와 성경공부를 통해서 단 한 번도 복음의 진리를 듣지 못한 채 이적과 기적으로 기독교를 보는 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예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복음의 내용을 하나하나 알아가고 있습니까?
마5: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2 και ανοιξας το στομα αυτου εδιδασκεν αυτους λεγων
카이 아노익사스 토 스토마 아우투 에디다스켄 아우투스 레곤
직역) 그리고 입을(스토마) 열었다(아노이고). 가르치며(디다스코) 말씀하신다.
검으로서의 말
“입”은 “말”이 나오는 기관입니다. 그 “말”을 성경은 “검”이라고도 하고, “영”이라고 합니다. 말이 검이라는 것은 우리의 옛 자아, 율법의 자아, 시내 산(율법적 선악구조)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나를 공격하고 심판하는 기능으로서의 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듣고(율법으로) 잘못 가르치면(거짓증거) 형제의 귀를 자르는 것이 됩니다.
요 18:10 이에 시몬 베드로(율법)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마 26: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으로 떨어지면 귀가 잘려 진짜 들어야 할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끊임없이 “들은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들을 귀가 잘려진 자는 듣지 못합니다.
막 4: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계 2: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영으로서의 말
말이 영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과 삶에 영향을 주고 그들을 지배하는 힘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차원에서 영이라고 합니다. 이전에 말씀 드렸듯이 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겠다는 불신의 선택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영적인 거대한 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고후4: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시내 산과 산상수훈의 산 사이에
이렇게 검으로서의 말과 영으로서의 말이 바로 예수님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이 검으로서 시내 산의 나, 율법적 선악구조와 탐욕을 따라 살고 있는 나를 자르고, 영으로 임하는 말씀(오순절 성경 강림)이 되어 생명을 가진 자로 살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내 산에서 선포된 그 율법이 나를 살리는 산상수훈의 그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역사 한 가운데 오롯이 세워져야 합니다. 그 십자가가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끝내고(구원하여)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은혜의 복으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하 아담) 창조하시되 남자와(자칼) 여자를(네케바)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
이렇게 아래의 입으로 태어난 사람은 위의 입, 즉 하늘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의 말로 가르침을 받아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 즉 여자로 존재하는 “네케바”가 하늘의 씨, “자칼”을 받아 생명으로 잉태되어야 사람(하 아담/살아 있는 존재)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땅으로 존재하는 네케바가 씨로 임하는 자칼을 만나 하 아담, 사람이 되면 그 생명이 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나타날까요? 생명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하늘의 말을 받아 그 말을 자신의 입으로 하는 자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눅 1:64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행 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방언)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하늘의 입이 열려 진리가 떨어짐
이렇게 산상수훈은 율법이 선포된 산에서, 율법의 집행자이신 하나님의 입이 열려 산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선포된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입이 열려 말씀을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산 아래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선포될 때 하늘이 열리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열린 하늘과 열린 땅이 만나 생명이 됨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와 우리의 마음으로 전달될 때는 그 말이 나오는 하늘의 입도 열리고, 그 말을 받는 마음도 열리는 것입니다. 그 일을 누가 하신다고 합니까? 말씀이 선포될 때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것처럼, 성령 하나님이 이 땅에서 그 말씀을 받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십니다(이심전심으로 전달되는 생명). 그래서 하늘이 열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실 때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열린 하늘의 진리를 받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 5: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요
무엇을 구하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것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 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닫혀 있는 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닫혀 있는 문은 무엇이겠습니까? 열린 하늘에서 하나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 말씀을 우리가 받을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최초의 자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내 마음이 닫혀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성도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의 문이 열린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열려 하늘의 생명이 잉태되고 출산되어 거듭난 자가(하늘로 태어난 자) 되는 것입니다.
여덟이 팔복으로 살아가는 삶
그렇게 열린 하늘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영으로 받은 자의 삶이 팔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복은 “~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복된 자의 존재적 상태”를 여덟 가지 복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방주에서 나온 여덟 명이 상징하는 것처럼 여덟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1. 심령이 가난한 자 2. 애통하는 자, 3. 온유한 자,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5. 긍휼히 여기는 자. 6. 마음이 청결한 자, 7. 화평하게 하는 자, 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그래서 여덟 가지의 복이 칠의 언약을 받아 팔의 날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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