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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새벽기도 말씀

세례란 무엇인가?

by 다바르아마르 2020. 4. 11.

세례를 대부분 교회에 입회하는 의식/예전 정도로만 생각한다. 그리고 그 형식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고 세례증이라는 것도 주어진다. 이 증을 가지고 있으면 일종의 구원을 받았다는 느낌을 준다. 세례를 중요시하는 만큼 물에 침수하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뿌리는 것이 맞느냐? 가지고 논쟁을 펼쳐왔다.

 

유아세례, 재세례 문제만으로도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유아세례와 침례문제로 죽은 사람이 12, 13세기 두 세기 동안만하더라도 무려 50,000,000명 이상이다. 그들은 진리를수호한다는 명목으로 셀 수 없는 사람을 죽였다. 세계 대전을 제외한 모든 전쟁보다도 더 많은 사람이 세례문제로 죽었다. 그 종교에서 탈피한 것이 신교인데, 신교 또한 마찬가지로 교리문제로 재세례파를 죽였다.

 

성경에서 이러한 세례의 장면을 가장 잘 그린 것이 노아의 홍수 사건이다. 홍수 사건은 바싸르(육체)는 멸하고(세례하고/할례하고), 노아(안식/그리스도)로 만들겠다는 약속이다. 그 메시지를 담기위한 네러티브이다. 용사가 된 네피림들을 멸하고(세례/죽음), 그리스도로 덮어 노아(안식/부활)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바싸르를 멸하고 그리스도로 옷입게 하는 하나님의 열심이다. 바싸르는 다름아닌 이다. 네피림인 나를 세례하는 장면이 노아의 홍수이다.

 

베드로후서에서도 홍수를 세례로 해석하고 있는데, 어떻게 해석하고있는가?

 

벧전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전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데오스)을 향한 선한 양심(suneivdhsi")의 간구니라

 

4893  suneivdhsi"   suneidesis  {soon-i'-day-sis}

4894의 연장형에서 유래;공통된 지각, 즉 도덕적 의식, 양심 <고전 8:7>여명.conscience;

 

함께 보는 것(에이도). 하나님과 함께 보는 것이다.

 

데오스는 정관사가 없어서 하나님이라기 보다는 그냥 신이라고 볼 수 있다.하나님을 향한이라고 번역되어 지려면 프로스 전치사를 쓰여 한다. 여기에서는 목적격인 에이스전치사를 쓰고 있다. 목적은 데오스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세례는 데오스를 목적으로 온전한(아가도스) 하나님과 하나된 시각의 간구이다. 그래서 세례라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시각을 얻는 것이다. 회개(메타노에오)가 아버지와 한 마음이 되는 것을 뜻하듯이 세례도 하나님과 같은 의식을 같는 것이다. 그것을 선한 양심이라고 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양심이 아니다. 같은 시각을 가진 존재를 데오스라고 한다. 그것이 세례의 목적이다.  ego는 죽고 진정한 참존재만 남는 것을 뜻한다.

 

사도바울도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는 사건을 세례로 보았다.

고전 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도 홍수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노아의 홍수심판은 출애굽 홍해 도하와 똑 같은 것이다. 세례이다! 이스라엘의 홍해에서의 죽음이다.

 

홍수 심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바로 이 홍수 기사를 읽는 날이 여호와의 날이 된다. 누군가에게는 세례받는 날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심판이 된다. 홍수 기사를 통해서 세례를 받은 자들은 윗물을 내려 받은 날이 될 것이다. 창세기1장의 2일의 언약이 실현되는 날이다.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고, 나는 그걸 믿어! 그걸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성경을 믿으면 그냥 로고스로 남는다. 그러면 그 로고스가 심판을 한다.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지가 아니라 내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즉 홍수 기사를 통해 세례가 되어야 한다. 말씀을 읽을 때마다 씻기심을 받는 것이 세례이다. 즉 나는 날마다 죽노라!를 경험하는 자리이다.

 

세례가 교회에서 처음 시행된 것은 언제인가? 바로 오순절이다( 2:41). 결국, 세례는 성령 받는 자가 성령의 능력에 의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새생명 안에 살게 되는]( 6:4,7) 계기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예하는  세례이다.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6: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그리스도의 몸에 유기적으로 연합하는 것이 세례이다(고전 12:13).

 

고전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12: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고전12: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세례라는 것은 단순히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몸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카페르)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그리스도를 목적으로(에이스 크리스토스 밥티조) 그리스도를 옷 입는 것이 세례이다. 그것은 죽음을 전제로 한다. 그 죽음이 할례이다. 할례는 바싸르를 베어내는 것이다.

 

17: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7:11 너희는 포(6190  hl;rÒ[;)(1320  rc;B)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30: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이처럼 세례도 마음의 세례가 중요하다. 겉치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다. 물조금 뿌리느냐? 담그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굳이 성경적 의식이라 하면 세례보다는 물에 온전히 담그는 것이 보다 더 성경에 가까운 의식일 것이다. 그러나 세례이든 침례이든, 그것은 외형적 의식에 불과하다. 세례/침례는 단순히 교회에 입회하는 형식이 아니다. 의식보다는 성령으로 세례받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