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테오는 파스코(3958/고난을 당하다)와 관련이 있는데, 파스코의 명사형은 파스카(3957 pavsca)이다.
3996 penqevw pentheo {pen-theh'-o}
3997에서 유래;‘슬퍼하다’(감정이나 행동), 애도하다, 울부짖다 <마 5:4>동. to mourn, grieve;
3997 pevnqo" penthos {pen'-thos}
3958의 대체어에서 유래된 강세형;‘슬픔’, 애도 <계 18:7>중명. mourning, grief;
3958 pavscw pascho {pas'-kho} including the forms (patho {path'-o} and pentho {pen'-tho}), used only in certain tenses for it
patho, <파도>와 pentho, <펜도>(어떤시제에서 대신 사용되는 형태)를 포함 기본동사인 듯; 감각또는 인상을‘체험하다’(고통스러운), 고난 당하다 <막 9:12>동. to suffer, endure, to experience;
3957 pavsca pascha {pas'-khah}
기원은 아람어【6453과 비교】;‘유월절’(음식, 날, 축제 혹은 유월절과 연결된 특별한 희생), 부활절 <마 26:2>중명.passover;
파스카는 유월절이라는 뜻이다. 슬픔은 유월절과 관련된 슬픔을 뜻한다. 그렇다면 유월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유월절에 애굽인들은 장자가 죽는 사건이 있었다. 장자가 죽었을 때 애굽에는 애통의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다. 장자가 죽는 것은 애굽인들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펜떼오이다. 그러나 유월절 양을 잡고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른 자는 재앙을 넘어갔다. 넘어갔다는 뜻이 유월이다.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양을 통해서 넘어가는 것이다. 자기가 죽어야 되는데 어린 양이 대신 죽는 것이다. 어린 양이 대신 죽긴 하지만 결국은 자기 죽음을 알려주기 위한 메시지이다. 그것이 곧 십자가이다.
고전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히11: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한 것이며
유월절 양은 곧 그리스도를 뜻하는데(고전5:7; 히11:28), 우리도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음의 동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죽음이다. 그렇게 출애굽 하는 것이다. 그렇게 출애굽하여 새로운 곳에 파라칼레오(수동)되기 때문에 복이다.
3870 parakalevw parakaleo {par-ak-al-eh'-o}
3844와 2564에서 유래;‘가까이서 부르다’, 즉‘초청하다’,‘기원하다’(탄원, 충고, 위로에 의해), 청하다, 요구하다, 위로하다, 욕망하다, 훈계하다, 부탁하다, 기도하다 <행 13:42; 살전 4:10>동.to call near, exhort, encourage;
parakalevw(3870, 파라칼레오)
소환하다, 초청하다, 권하다, 훈계하다, 격려하다, 애원하다, 간구하다.
동사 파라칼레오는 파라(parav, 3844: ~곁에)와 칼레오(kalevw,2564: 부르다)에서 유래했으며, '자기 곁으로 부르다'를 의미한다. 부르다(kalevw)라는 뜻이 가장 기본어근이다. 위로 받을 것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초청을 받을 것이다(미래/수동)라는 뜻이다.
1577 ejkklhsiva ekklesia {ek-klay-see'-ah}
1537의 합성어와 2564의 파생어에서 유래;‘불러냄’, 즉(구상명사)대중‘회합’, 특히 종교적 ‘회중’(유대회당, 혹은세상에서 기독교인, 사회구성원이나 하늘의 성도, 혹은 둘다), 집회,교회<마 16:18;엡 1:22;몬 1:2>여명.assembly;
교회라는 뜻이 바로 칼레오(2564 kalevw)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교회란 ~로부터(1537 ejk) 불러낸 자들이라는 뜻이다. 슬퍼하는 자들이 복인 것은 그들이 교회로 부름을 받을 것이기때문이다.
사43:1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ar:q)너는 내 것이라
이렇게 부름을 받은 존재가 교회(에클레시아=에크+칼레오)이다. 따라서 초청을 받는다는 것은 천국개념과 동일한 것이다. 천국(교회)로 초청을 받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에게 찾아오는 천국처럼 슬퍼하는 자들에게 찾아오는 천국이다.
벧전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칼레오/kalevw)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유월절에 동참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로 초청을 받는다. 광야교회이다. 애통하는 자 복이 있다. 그들이 천국으로 초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천국 초대장]이다. 아버지의 눈물젖은 편지이다. 그 편지는 천국 초대장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망하지 않은 자! 결코 애굽교회에서 나오지 않는다. 신앙생활 열심히 해서 행복한 이들은 아버지의 눈물젖은 편지를 읽을 수 없다.
그래서 8복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가난, 천국, 애통, 천국! 모든 내용이 회심! 천국!이다.
애통한 자에게 천국이 침공하는 것이다. 스스로 거지가 되어야, 슬퍼하는 자가 되어야 천국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거지인 자, 망한 자에게 지금 찾아 오는 것이다.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니? 이제 눈물이 좀 이해되니? 나의 눈물 말이다. 어두움으로부터 빛이 임하는 것이다. 세상은 어두움이다. 어두움인 곳에 빛이 임하는 것이다. 거지인 상태, 슬픔인 상태인 자에게 ‘하나님이 ’‘하늘’에서 ‘땅으로’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천국으로 초청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국은 오직 은혜의 나라이다. 지옥으로부터 출발하여 천국이 도래하는 것이다.
눅가복음은 조금 다르게 표현한다. 가난이 그렇듯 누가복음은 보다 직설적이다.
눅6: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마태는 애통이라는 단어 ‘펜떼오’라는 단어를 썼는데 누가는 클라이오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즉 우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다. 눈물이다. 눈물이 왜 복이 될까?
사61:1 주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사61:2 여호와의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61:3 무릇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하심이라
사61장은 산상수훈의 내용과 똑같다. 똑같이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가 등장을 한다. 이들에게 위로를 선포한다. 이사야에 보면 마음이 상한 자와 가난한자가 함께 나온다. 그리고 뒤에는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한다고 나온다.즉 슬픔과 위로는 한 쌍이다. 3절에도 근심이라고 나오는데 슬픔과 같은 단어이다. 그 슬픈 자들을통해서 영광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래서 눈물이 복인 것이다.
왜 슬픔과 위로가 한 쌍일까?
파라칼레오는 초청하다라는 뜻이 가장 기본이다. 그리고 위로하다라는 뜻도 있는데 성령을 ‘파라클레토스’라고 한다. 그런데 이 파라클레토스가 바로 파라칼레오로부터 유래한 말이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하리라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3875 paravklhto" parakletos {par-ak'-lay-tos}
3870에서 유래;‘중보자’,‘위로자’, 변호자 <요 14:16; 요일 2:1>남명.called to one's side, mediator, comforter, advocate;
3870 parakalevw parakaleo {par-ak-al-eh'-o}
3844와 2564에서 유래;‘가까이서 부르다’, 즉‘초청하다’,‘기원하다’(탄원, 충고, 위로에 의해), 청하다, 요구하다, 위로하다, 욕망하다, 훈계하다, 부탁하다, 기도하다 <행 13:42; 살전4:10>동. to call near, exhort, encourage;
보혜사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인데, 부르시고, 위로하고, 가르치신다. 보혜사는그래서 위로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 보혜사는 주님의 죽음으로 넘겨진 진리의 영이요 선물이다.
예수가 우리의 위로자이다. 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우리가 흔히 공감능력이라고 하는데 정말 공감이 될 때는 나도 그것을 당해 본 사람이 가장 공감이 갈 것이다. 그래서 고통을 함께 당한 예수가 위로가 되는 것이다. 위로를 해주려면 나도 그 고통을 당했을 때 위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슬픔과 위로는 한 쌍이다. 상처입은 사람이 치유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그 상처를 알기 때문에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눈물젖은 빵을 먹어 본 사람은 눈물 젖은 빵을 먹고 있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파산 당해 본 사람이 파산 당한 자를 이해할 수 있다. 다리 짤려본 사람이 그 사람을 진정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누가 그 모든 경험을 다 한 사람이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는 아버지 밖에 없다.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위로해줄까? 라는 윤복희의 여러분이라는 노래가 있다. 내가 만약 외로울 때 누가 위로해줄까? 이제 답할 수 있다. 나의 님! 나의 하나의 님!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의 그 아픔의 자리가 십자가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곧 우리 인간의 애통의 공유이다. 탕자가 집 나가 있을 때의 아버지처럼, 예수의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할 때 아버지도 함께 울고 있다. 아브라함도 울었다. 세상 모든 피조물이 함께 울었다.
하나님의 눈물! 언뜻 이해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렘14:17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라 내 눈이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상처로 말미암아 망함이라
흔히 하나님은 울지 않는다고 한다. 아니다. 하나님도 운다. 아들이 울 때 함께 운다. 망한 자들로 인해 아버지가 운다. 아들이 눈물흘릴 때 아버지는 피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서에도 보면 예수께서 종종 눈물 흘리시는 모습이 나온다.
사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우리의 슬픔을 당했다. 우리의 슬픔을 그가 가져갔다. 그리고 우리에게 위로의 선물, 보혜사를 넘겨 주었다. 함께 고통을 당했다. 고통당한 자만이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자가 위로해줄 수 있다. 그 아픔을 당한 사람이 위로해줄 수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참사가 있다.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신 것일까? 아니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짝이다. 아버지는 아들과 짝되어 호흡한다. 그래서 내가 아파할 때 그도 아파하는 것이다. 내가 울 때 그도 우는 것이다.
우리는 6년전 세월호 참사를 목격했다. 그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질문한 것이 만약 당신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왜 당신은 침묵만 하고 계십니까? 꽃다운 청춘들이 물에 잠겨 죽어가고 있는데 왜 당신은 침묵하고 계십니까? 세월호참사 때문에 하나님을 다시는 믿지 않겠다. 또 어떤 분들은 최소한 한 가지는 알았다고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 없다라고..., 하나님은 울지 않는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어떤 논리로도 그들을 위로해줄 수 없다. 다만 함께 울 수밖에 없다.
다만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는 아들과 짝으로 산다. 우리가 울 때 아버지도 운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피조물도 탄식하고 있다고 한다(롬8:22). 하나님은 수퍼맨이 되어 아이들을 구해주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수퍼맨처럼 오셔서 배를 들어올리면 과연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까? 세월호 뿐이랴?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왜 고통이 존재하는가?이다. 가장 어려운 신학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애통과 위로는 짝이라는 사실이다. 애통과 위로는 짝이다.
시편에는 눈물흘리는 장면이 참으로 많이 나온다. 시편에는 눈물이 절절 흐른다. 창세기도 마지막에는 눈물로 끝난다.
시6:6 내가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시6:7 내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다윗의 시이다. 다윗이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운다고 했다. 얼마나 눈물을 많이 흘렸으면 자신의 요를 적셨다고 한다. 그러나 저녁에 눈물이, 울음이 있으나 아침에는 기쁨이 온다.
시30:5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30:11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시30:12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된다. 기쁨이 된다. 찬송이 된다. 감사가 된다. 눈물없는 인생없다. 눈물이라는 것이 없으면 눈은 상한다. 볼 수 없다.
시126: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126: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그래서 애통과 위로는 짝이다. 애통한 자를 천국으로 초대한다. 그래서 천국은 위로의 나라이다. 이것이 하나됨이다. 하나됨을 이해하면 모든 것이 하나된다. 슬픔 대신 화관을…어둠이 빛으로 하나된다. 그게 십자가 사건이다. 그리스도와 나의 하나됨이다. 그가 내 슬픔을 지고 나에게 위로(화관)를 넘겨준 사건이다. 죽음과 부활이다. 그렇게 위로의 선물이 내게 넘겨 지는 것이다. 예수의 애통! 성령의 위로! 짝이다. 그래서 그것이 천국이요 교회이다. 에클레시아이다. 초대받은 자들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눈물 젖은 편지를 받은 자들이다. 이걸 알게 되면 참된 위로가 주어진다.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아버지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신다고 한다. 이 구절 때문에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으로 자꾸 생각한다. 왜냐하면 눈물이 없는 곳은 천국 밖에 없을 것이라고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눈물을 흘리는가? 처음 것들 때문에 눈물 흘린 것이다. 전체적인 맥락으로 볼 때 단순히 인생사가 어려워서 눈물 흘리는 것을 말하는것이 아니다. 지금 성전에 관한 맥락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옛성전, 율법은 눈물을 흘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 구절이 이 눈물에 대해서 보다 상세히 설명하는데 그것은 사망, 애통, 곡, 아픔이다. 즉, 처음 성전은 사망, 애통, 곡, 아픔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새성전이 된 이들도 과거에는 사망, 애통, 곡, 수고가 있었다는말이다. 그런데 이제 그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준다. 왜? 4절 이전에 3절에 그 이유가 나온다.
계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skhnhv)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임마누엘이기 때문이다. 하늘 짝으로 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천막을 치고 함께 계신 것이다. 어떻게? 육신에 말씀으로 거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가 성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도가 새성전이 되었다(고전3:16). 이제 눈물이 기쁨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것이 위대한 반전이다.
결혼식에 초대장이라는 것이 있다. 오늘 본문은 망한 자! 슬퍼하는 자를 향한 천국의 초대장이다. 그런데 그 초대장에 눈물이 뚝뚝 떨어져 있다(고후2:4, 빌3:18). 아버지의 애통이다. 예수의 십자가이다. 십자가에서 아들도 울었다. 아버지도 울었다. 모든 피조물이 함께 울었다..
오늘 본문에서 애통은 현재형이다. 성도의 삶에 애통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애통이 더 이상 애통이 아닌 것은 위로가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울어도 혼자 울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울어도 같이 울고 기뻐도 같이 운다. 이것이 하늘 짝의 삶이다. 이제 울어도 같이 울어 주는 이와 함께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울어도 외롭지 않은 것이 하늘 짝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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