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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새벽기도 말씀

행복하다 슬퍼하는 자들이여

by 다바르아마르 2020. 3. 27.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산상수훈의 주제는 한마디로 회심! 천국이다. 예수께서 입을 열어 처음 말씀하신 것이 행복이다. 예수는 말한다. 가난한 자여! 행복하다! 라고선언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또 애통하는 자, 즉 슬퍼하는 자! 그대여 행복하다고 한다. 이 행복이 일반적인 행복이라면 웃는 자가 복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기뻐할 때 그것을 행복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오히려 슬퍼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한다. 왜 슬픔이 오히려 복이 되는가?

 

예수께서 말하는 행복은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행복과 전혀 다른 것이다. 즉 가치관의 완전한 전도이다. 그것이 곧 回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자가 행복하다고 생각을 한다. 부자는 물질적인 부자도 부자이지만 종교적인 부자도 부자이다. 그렇다고 가난해지라는 말도 아니다.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자신은 부자라고 생각을 하지만 실제로는 거지라는 것이다. 이것이 곧 베드로의 3번 부인이며, 또한 3번 고백이다. 나는 예수를 3번 부인한, 완전히 부인한, 즉 다른 예수를 섬기고 있었구나! 그 자리에 서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천국의 침공이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찾아와서 묻는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3번이나 물었다. 주님이 물을 때 베드로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주님이 아십니다”. 또 묻는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3번째 묻는다. 이제 베드로는 3번 부인한 자신이 생각난다. ~ 나는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이구나! 아 내가 의인이 아니었구나! 내가 죄인 중의 괴수였구나! 내가 바로 사탄이었구나! 이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조차 모르겠다. 오로지 당신이 안다.

 

나는 모른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나는 열심히 종교생활을 했다. 그래서 나름 거룩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가진 그 기준으로 옆 사람을 평가하고 있다. 나는 열심히 새벽기도에 참여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어느 집사, 장로가 기도회에 나오지 않았나 출석을 체크하고 있다. 누가 누가 십일조를 냈는가? 주보를 살펴보고 오자를 검토하고 있다. 오자가 하나라도 생기면 부교역자를 면박을 주곤 한다. 그런 내가 바로 사탄이었구나! 그렇게 하나님 나라가 침공해서 나를 그 자리에 서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부자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가난한 자였구나! 그냥 가난한 것이 아니라 거지였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침공이다.

 

어쩌면 돈만큼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파산 만큼 힘든 일도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적 파산 상태를 경험하는 것! 그것이 탕자의 파산이다. 이러한 영적 파산의 상태! 그 고백이 가난한 자이다. 그런 파산 앞에 엄청난 고통이 밀려올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애통이다.

 

그 파산으로 인해 엄청나게 슬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과 애통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3996  penqevw   pentheo {pen-theh'-o}

3997에서 유래;슬퍼하다(감정이나 행동), 애도하다, 울부짖다 < 5:4>. to mourn, grieve;

 

펜떼오는 그래서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말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하늘이 무너지는 애통을 계시록은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18:11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18:15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18:19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이 세상 삶의 터전이던 큰 성 바벨론이 불타고 무너지며 그 안에 있던 모든 상품들이 불에 타서 없어지는걸 보면서 장사꾼들은 울고 불고 난리가 난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붙들고 있는 것이 사라져 없어졌기 때문이다. 자신은 의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통째로 부정되는 애통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아니 의인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사실 자기 자신이 사탄이었음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그렇게 하늘이 무너진 경험이 있는가?

 

흔히 말하기를 하늘이 무너진다고 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야 솟아날 구멍이 생긴다. 옛 하늘이 무너져야 구멍이 뚫려 새 하늘을 보게 된다. 하늘이 무너질 때 무너진 그 하늘에 구멍이 나고 그 구멍을 통하여 새로운 하늘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게 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만큼 회심을 잘 그린 것이 없다.

 

부자로 살았던 아들! 아버지 집을 나갔다. 아버지 집을 나가고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가 사는 곳이 돼지 우리였고 자신이 먹는 음식이 돼지 먹이라는사실을 알았다. 탕자의 비유는 앞에 있는 비유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함께 보아야 한다. 잃어버린 드라크마, 잃어버린 양의 비유가 나온다. 그런데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주인이 찾았는데 그것을 회심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탕자가 돌아온 것도 아버지가 그 아들을 찾은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탕자의 집나감! 즉 거지됨을 허락한 것이다. 그것이 눈물의 의미이다. 아들의 눈물 뒤에는 자식을 떠나 보내야만 했던 아버지의 눈물이 있는 것이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자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나는 말하고 싶다. 아버지의 눈물 젖은 편지를 읽지 못한 자! 성경을 논하지 말라! 성경은 눈물 젖은 빵이다. 아버지의 눈물이 젖은 양식이다.

 

80:5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눈물은 양식이다. 눈물 없는 인생 없다. 그것이 아들이 집나가는 것을 허락한 아버지의 마음이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가기 위해 돼지 우리로 보낸 것이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눈을 떠보니 그것이 돼지 우리인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그렇게 먹었던 양식이 쥐염 열매에 불과하다는 것을 본 것이다. 그리고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 그 애통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들에게는 눈물이지만 아버지에게는 피눈물이다. 아버지가 그를 세상으로 보냈다. 집 떠난 탕자가 망했는데 그게 복이라고 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고백하는 바울! 그런데 그게 복이라고 한다.

 

그에 대비되는 첫째 아들! 즉 바리새인이 등장하는 것이다. 바리새인이 도대체 뭘 잘못했길래? 그들은 완벽한 종교인 아니었는가? 그게 또 집나가기 전 아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바리새인은 세리를 보면서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 나는 어떤 죄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기도 안치고, 또 나는 노래방도 가지 않았고, 노래방 도우미하고 놀지도 않았습니다. 저기 있는 저 세리는 어떻습니까? 제들은 탈세도 했지 않았습니까?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금식하고, 또 새벽기도 꼬박 꼬박 나왔어요. 또 십일조는 얼마나 잘 냈습니까? 그리고 노방전도는 얼마나 열심히 했습니까? 저는 술도 한잔도 안합니다. 저는 거룩하거든요! 하나님!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저 세리와 같이 안 살아서 참 다행입니다. 이게 다 하나님 덕분입니다. 저는 열심히 봉사했고 착하게 살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세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애통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주님을 세번 부인한 죄인입니다. 그래서 실상은 바리새인은 부자라고 생각하지만 가난한 자요, 가난한 자라고 생각하는 세리에게 은혜가 침공된다는 것이다. 여호수아서에 세상 왕들은 다 죽었지만 오로지 창녀 라합만이 그 나라에 들어갔다. 그리고 애굽에서도 세상 왕은 그 나라에서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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