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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복음에 대한 오해

by 다바르아마르 2020. 4. 21.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면서 오해하는 것이 있는데 그건 하나님의 말씀은 평화의 복음이며 위로의 말씀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입니다. 물론 맞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평화를 전하는 복음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하나님의 말씀은 무조건 부드러워야 하고 위로와 격려를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평화란 원수된 관계를 회복한, 서로 살육해야 하는 전쟁의 상태를 해결한 어떤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부드러운 어조와 귀에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것이 평화의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서들은 거의 전부가 죄를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하고 그렇게 살면 ‘망한다, 죽는다, 하나님이 버린다’는 말씀들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뒤집어 보면 본래 인생들은 하나님이 멸망시키고 망하게 해야 하는 멸망의 자식들입니다. 출애굽을 생각해 봅시다. 결국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고 양의 고기를 전부 먹고 무교병을 먹어서야 탈출을 하게 만들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9가지 재앙 후에 장자를 치는 10번째 재앙을 하고서야 이스라엘을 탈출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분명 구원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10가지 재앙이라는 그리고 특히 마지막 장자재앙이라는 틀에 넣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양을 잡아 그 피로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이지만 거꾸로 보면 이스라엘도 그 피가 없으면 전부 죽임을 당해야 하는 저주의 대상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아무런 자격이나 조건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이고 애굽이 이스라엘입니다. 애굽이라는 세상에서 자기만을 위해 살다가 전부 죽어야 하는 저주의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살게 됩니다. 이것을 평화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냥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고 부드럽게 말하면서 분위기 좋게 하는 것을 평화의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피가 하나님과 원수 된 사이를 화해하게 만들어 샬롬으로 만들어 낸 것을 평화, 화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피가 묻어있는 평안입니다. 원수된 관계, 하나님이 나를 죽여야 하는 관계인데 그 하나님이신 예수가 자신이 죽어 그 피를 나에게 바르고 자신의 살을 먹게 하여, 즉 진리이신 예수를 말씀으로 먹게 만들어 내 안에 들어와 이루어 내신 상태를 바로 샬롬, 화평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원수로 보던 관계에서 예수로 보는 관계가 바로 샬롬의 관계입니다. 나를 예수처럼 보는 관계가 된 것이 화평입니다. 

롬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좋은 말 해 주고 다 잘 될 거라고 용기 주고 심리적 상처나 치유하고 잃어버린 자존감 회복시켜 주는 것이 평화의 복음이 아닙니다. 참 선지자들은 이런 거 해 준 적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된다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노예로 팔려간다고 거침없이 그리고 직설적으로 공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선지자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선지자들은 예수를 예표하여 죽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단코 인간들은 그 지적하는 말과 회개하라는 경고를 받아들일 겸손한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나 잘되라고, 안심하라고, 용기를 가지라고, 당신의 작은 가능성을 믿으라고 하는 칭찬과 격려의 말만을 들으려고 하는, 자존심을 세우는 거짓 복음만 들으려고 하기 때문에 결단코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습니다. 자존심을 꺾고 자기 의를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경고를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죽인 자들이 예수도 죽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죄입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회개의 복음, 이것이 참된 평화(샬롬)의 복음인데, 이 회개의 복음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오직 심리학적인 언어들로 물들어 버린 거짓 복음, 긍정의 복음, 위로의 복음만을 들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강단에서 회개하라고 경고하는 말씀은 듣기 힘듭니다. 

겔13:9-10 
9 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10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어떤 사람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거짓 선지자들은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평강 즉 샬롬이란 예수가 죄인의 죄를 대신 지고 처참히 죽는 것을 인정하고 그 십자가에 기대어 오직 예수만 나의 생명임을 인정할 때 주어지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죄를 인정하지 않고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자기가 죄인임을 처절히 고백하지 않고도 평강이 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오히려 성공하고 출세하고 돈 많이 벌고 병에 안 걸리고 건강하여 이 땅에서 잘 되면 그게 평강이라고 가르칩니다. 성경에는 그런 평강은 없습니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공회에 들어오게도 하지 말고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올리지 말고 이스라엘 땅에서도 쫓아내라고 합니다. 

눅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예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답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칭찬을 좋아하고 좋은 얘기만을 들었기에 망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왜 칭찬과 부드러운 말을 들으려고 합니까? 내 안의 죄가 들통 나고, 괜찮은 척 하고 의로운 척을 하는 모든 껍데기가 벗겨져서 오직 예수의 피 공로로만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가 된다는 복음만을 붙들게 되어야지 왜 칭찬의 말, 거짓 평안의 말만 들으려 하느냐 이겁니다. 

오늘 본문도 잘 보세요. 전부 이 땅의 안위와 행복과 자아를 기쁘게 하려는 자들에 대한 경고이며 저주의 내용입니다. 1-2절을 보시면 이렇습니다. 
1 레바논아 네 문을 열고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 
2 너 잣나무여 곡할지어다 백향목이 넘어졌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쓰러졌음이로다 바산의 상수리나무들아 곡할지어다 무성한 숲이 엎드러졌도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당대 최고의 목재입니다. 바산의 상수리나무도 마찬가집니다. 전부 인간의 자부심의 상징으로 나오는 것들입니다. 전부 불사르고 넘어지게 하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자부심과 자존심과 인간이 추구하는 영광을 전부 불태우고 넘어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영화로운 것들을 빼앗는 것이 복음입니다. 결단코 이 땅에서 거짓 평안을 누리도록 부추기고 격려하고 축복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거짓 평안과 자존심을 전부 부수어버리고 그 자랑들을 쓰러뜨려 자아를 포기시키는 것입니다. 6절과 9절도 보겠습니다. 

6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주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들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지라도 내가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 하시기로 
9 내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리라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하는 자는 망하는 대로, 나머지는 서로 살을 먹는 대로 두리라 하고 

하나님은 레바논의 백향목과 바산의 상수리나무들과 같이 자기의 가치와 자랑으로 자부심을 가진 인간들을 결코 건지시지도 않고 살려 주시지도 않습니다. 자기라는 신을 섬기며 자기의 영광이 곧 신앙인 자들을 죽게 내버려 두십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복음은 한 편은 불쌍히 여기며 예수가 대신 피를 흘려 살려내시지만 다른 한 편은 결코 살려내지 않으며 죽게 내버려 두고 망하는 대로 놔두는 것입니다. 칭찬 듣기를 원하고 부드러운 격려와 위로를 원하고 오직 자아의 자존심을 위해서만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 평안을 구하는 자들은 결코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10-11절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0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꺾었으니 이는 모든 백성들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 
11 당일에 곧 폐하매 내 말을 지키던 가련한 양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던 줄 안지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세우신 언약, 다시 말해서 주변 나라들로부터 보호하시겠다는 그 은총이라는 언약을 폐하셨다는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 가련한 양들은 그 은총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만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편안한 상태, 아무런 걱정 근심이 없는 상태, 누구도 나를 괴롭히지 않는 안전하고 잘 되고 병들지 않고 건강하고 형통한 상태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은총의 상태라고 믿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하는 은총의 상태, 평안의 상태를 깨뜨려 버리고 그것이 은총이 아니라고 뒤집으십니다. 그리고 참된 은총이란 인간들이 상정한 거짓 평안의 상태가 아니라고 보란 듯이 그 개념을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도가 추구하는 거짓 평안을 공격하여 내가 생각하는 평안, 은총이 하나님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있고 망하게 하시고 병들게 하시며 환란을 겪는 것입니다. 외부 나라들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고 죽이고 망하게 하십니다. 잘 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자랑과 이 땅의 형통을 모두 꺾어서 모든 육적 소망을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고후11:23-27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이 하나님을 위해서 이런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런 피곤한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이런 고통과 죽음의 위협 속으로 끌고 들어가신 것입니다. 거기서 참된 하나님의 은총, 평안을 발견하게 하시려고 세밀하게 이끌고 가신 겁니다. 

그것이 은총의 막대기와 연합의 막대기를 꺾어버리는 상징의 의미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뭐든지 나에게 좋은 말, 부드러운 어조, 사랑한다는 감성적 의미로 간주하고 어떻게든 나에게 유익을 주고 안위를 제공하고 천국까지 데려가는 듣기 좋고 아무런 부대낌이 없는 달콤한 속삭임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성경은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되도록 많이, 어떻게든 기분 나쁘지 않게 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천국에 데려가려고, 원하는 것 다 주겠다고 따듯하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은총을 완전히 꺾어 버리고 오직 예수가 내 죄를 뒤집어쓰고 죽어서 만들어낸 것이 평안이며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내 자아는 부인되어야 함을 인정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 하늘의 은총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는 부정되고 오직 예수가 내 안에 사시는 상태가 참된 연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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