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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새벽기도 말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by 다바르아마르 2020. 4. 21.

22: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22: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표현은 이것들 외에 더하면과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이다. 요한은 왜 이런 표현을 했을까?

 

이 구절은 독자가 이 예언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어야 한다는 위협으로 해석되었지만 실제로 이 말은 이책을 필사하는 필사자들에게 던지는 전형적인 위협이다.

 

이것은 당시 기록 문화를 이해해야만 이해할수 있는 표현이다.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는 지금처럼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다. 그래서 복사하는 기술이 없어서 성경을 복사하려면 일일히 필사자들이 필사를 해야 했다. 문제는 필사자들이 실수로 잘못 필사를 하는 경우도 있고, 의도적으로 본문을 변경시킨 경우도 많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의미가 본문에 더 잘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본문을 변경시켰다. 때로는 자신의 신학과 맞지 않으면 변경시킨 경우도 많다. 대표적으로 마르시온 같은 사람은 구약의 하나님 내용이 들어가면 의도적으로 뺐다.

 

2세기 중반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이 정경을 만들어낸 최초의 기독교인이다. 마르시온은 유대인들의 율법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근거로 율법과 복음은 완전히 상반되며 절대적으로 구분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마르시온은 예수(와 바울)의 하나님은 구약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목회서신인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를 제외한 바울의 이름으로 된 모든 편지 11권을 자신이 만든 정경에 포함시켰다. 구약은 한권도 없으며 복음서 1권과 열 권의 바울서신 뿐이었다. 마르시온은 11권에 필사자들이 그릇된 개념을 포함했다고 생각하여, 11권을 책을 교정했다’. 구약의하나님을 언급하거나, 창조를 참 하나님의 사역으로 말하거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 부분을 삭제한 것이다. 마르시온은 바울은 구약성서의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굳게 믿었다.

 

이처럼 그 당시에 말씀을 더하고 빼는 일이 실제로 다반사로 있었다. 요한은 그에 대한 경고이다.

이 책에 어떤 말을 덧붙이거나 빼서는 안된다는 경고였다. 오늘날은 인쇄술이 발달하여 더 이상 빼고 더할 수 없는 시대가 왔다. 그러나 문자를 더하고 빼는 일은 없더라도 말씀을 더하고 빼는 일들이 많다. 현대의 더하고 빼는 일들은 말씀을 말씀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일 것이다.

 

그래서 하늘의 말씀을 땅의 말씀으로 바꿔버리는 것이다. 땅을 통해 하늘을 알아야 하는데 땅적인 것으로 머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계시록의 재앙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리적, 문자적 그대로 일어날 재앙으로 보지 않는가? 그 재앙, 아버지의 일하심으로 나를 새창조하려는 그 목적은 보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취해서 무서워 벌벌 떨며, 계시록을 마치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서처럼 취급하며 사람들을 겁주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 예로 666짐승의 표를 베리칩같은 것으로 인식을 하면서 그것을 받으면 절대로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식으로 말씀을 적용한다. 이러한 모든 세대주의적 성경해석방식이 바로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더하고 빼는 것이 되는 것이다. 진리로 자유함을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멍에를 쒸운다.

 

또 천국은 어떤가? 천국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 천국을 땅적인 개념으로 바꿔서 말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천국의 실체를 누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견디면 언젠가 주어질 천국을 소망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천국에 다녀 왔다고 하는 자들이 많은데, 이들이 말하는 천국을 가만히 들어보면 자신의 욕망의 투사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경을 오독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지금도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드려, 소위 율법을 그대로 목숨걸고 지켜보려고 하는 소위 율법주의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을 손할례당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할례파가 그 당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그들은 있지도 않은 관습과 전통을 만들어 열심히 지키어 공로를 쌓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새벽기도인데, 새벽기도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으로 공로를 쌓는다거나,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평가하는 것으로 작용한다면 차라리 없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새벽기도라는 것이 농경시절에는 생활리듬에 맞을지 모르지만 요즘 같은 도시화 시대에는 건강에 너무나 해롭게 작용할 수도 있다. 실제로 많은 목사들이 새벽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오전에 잠을 다시 자는 경우가 많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율법에 열심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 모든 율법지킴을 배설물로 여겼다. 그런데 오늘날도 그와같은 신율법주의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들은 성경의 참 진의인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보다는 그 성경에 기록된 문자를 신봉한다. 그것이 바로 우상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구약의 바리새인들과 전혀 다르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를 핍박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의 말씀을 열심히 따른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누구나 바리새인이 되어봐야 바리새인에서 탈출한다. 마치 사도 바울이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것처럼…, 우리도 사실 바리새인이었다. 아니 사실 바리새인보다 못한 존재였다. 선악과를 통해서 생명과를 먹듯이, 지옥을 통해서 천국을 알듯이, 죄를 통하여 의를 아는 것이다. 율법은 율법가운데 머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성령의 법을 알라고 주신 것이다.

 

이렇듯 말씀을 더하고 빼는 경우가 많다. 즉 말씀을 변개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실제로 문자를 더하고 뺐지만 지금은 성경의 의도를 더하고 빼는 것이다.

 

성경책은 일종의 선악과와 생명과이다. 성경책을 선악과로 취할 수도 있고 생명과로 취할 수 있다. 그런데 말씀을 더하고 빼면 생명나무가 되지 못하고 새예루살렘성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성경을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 바로 그 의도대로 알아 듣는 것은 중요하고 생명이 달린 문제이다. 그래서 결국 성령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보혜사가 알려주지 않는한 불가능하다. 그래서 선물이다.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리고 20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하시고 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화답하고 있다. 아마도 요한 당시에는 회중들이 함께 외쳤을 말씀이다. 읽는 자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면 우리가 교독문을 읽는 것처럼, 청중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했을 것이다. 얼마나 감격적인 화답인가? 우리가 이 상태가 되어야한다.

 

모든 말씀이 아멘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281  ajmhvn   amen {am-ane'}

기원은 히브리어 【543;본래적 의미로는 굳건히,   (상징적으로)믿을 수 있는, (부사)확실히(가끔 감탄사로서그렇게 되옵소서), 아멘, 진실로 < 22:21>불변.amen, truly;

 

@mea;(543, 아멘)

진실로, 확실히, 그러하다

 

아멘은 아만(@m'a;,539: 신실하다, 확실하다, 믿을만하다, 확고하다

 

아멘은 히브리어(543)아멘에서 유래했는데 진리입니다. 확실히 그러합니다라는 뜻이다. 복음서에서 아멘은 예수님의 입에서만 나오는데, 주로 "진실로(아멘)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문구로 나온다( 3:28;  4:24). 이 단어의 반복용법 (아멘, 아멘)은 요한에 의해 요한복음에서만(25) 사용되었으며, 최상급의 의미를 가진다.

 

1:51 또 이르시되 진실로(아멘) 진실로(아멘)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아멘을 두번 사용함으로서 강조용법으로 사용한다. 아멘 아멘 레고수라고 함으로서 자신의 말이 확실하고 진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계3:14에서는 예수를 아멘이라고 한다.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피스토스)되고 참된(알레티노스) 증인(말투스)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아르케)이신 이가 이르시되

 

예수를 아멘, 피스토스, 알레티노스, 말투스, 아르케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 예수의 존재를 나타내는 단어들이다. 따라서 아멘은 존재 개념이기도 하다. 참된 진리의 존재가 아멘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는 자는 아멘이 되어진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목사가 자기의 마음을 터치할 때 던지는 장단구가 아멘이 아니다.

 

예수께서 속히 오리라! 진실로! 그러니까 아멘! 으로 청중들은 화답한다.

 

여기서 오신다는 것은 역사의 끝에 가서나 주 예수께서 오시겠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 모든 예언의 말씀을 듣고 아멘의 상태가 되어지면 그 그리스도 예수는 이미 내게 속히 임하신 것이다. 말 그대로 속히 임하는 것이다. 십가가 사건이 2,000년이 지났다. 아직도 육체적 예수는 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육체적 예수를 기다리는 자가 있다. 만약 그렇다면 속히 오신다라는 말이 성취되지 않은 것이다.

 

10:6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것이요 

10:7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10:8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진리의 말씀은 저 우주 너머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 음부 깊은 곳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그 진리의 말씀이 어디 있다고 합니까? “네게 가까워 네 입에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그 마음이 되고 그 말을 하게 되면 그리스도가 이미 우리에게 임한 것이다.

 

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되어 있습니까?라고 묻는 이들이 있다. 예수로 죽고 그리스도로 오시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아멘 그리스도여 오시옵소서! 이렇게 말해야 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는 메시야를 뜻하는 호칭이다. 그리고 예수는 그 메시야의 [이름]이다. 주 예수여! 할때 주는 큐리오스이다. 히브리어로 말하면 아도나이다. 여호와께 붙인 호칭이다. 그 호칭이 이제 예수께 붙었다. 즉 예수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는 그리스도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그렇다면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장차 오실 자라로 번역되어 있지만 현재분사로서 지금도 오고 있는 자이다. 지금도 그리스도는 오고 계신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는 예루살렘 돌성전을 심판하심으로 에르코마이”(임하다) 했다. 그리고 지금도 오고 계신다. 역사 속에 개입하시고, 개인 개인 한 사람에게 오고 계신다. 어떤 자에게 임하는가? 옛성전이 무너지고 새성전이 된 성도에게 온다. 이들이 아멘이 된 자들이다. 예수께서 아멘이듯이 아멘이 되어진 자에게 온다. 즉 하나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개인적종말을 맞을 때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됨이 완성될 것이다.

 

소위 말하는 마라나타 고백은 예수를 만난자의 고백이다. 님을 만난 자가 님을 그리워한다. 성도는 예수를 만난 자이다. 예수의 엘코마이(임하심)를 경험한 자이다. 부활을 경험한 자이다. 그렇게 맛을 본 자들이 맛을 그리워한다. 그것이 마라나타(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우리 주여 오소서)의 의미이다. 그리고 계시록은 이렇게 끝난다.

 

22: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이렇게 우리는 계시록을 덮게 된다. 요한 계시록을 종말론, 예수의 재림이라는 측면에서 많이 이해하지만 계시록 또한 그리스도만을 증거함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통한 새창조를 그리고 있다. 즉 복음의 진수가 계시록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계시록은 복음이다. 사실 창1:1에 이미 이러한 내용이 다 내포되어 있다.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에트 하샤마임 에트 하에레츠>할 때 샤마임에 정관사가 붙어 있고 하에레츠에 정관사가 붙어 있어, 이미 새하늘과 새땅을 염두해 두고 천지창조를 하신 것이다. 옛하늘과 옛땅은 새하늘과 새땅을 목적으로 창조된 것이다.

 

창세기도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신랑과 신부가 하나되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을 남자와 여자를 통해 이미 언약하셨다. 신랑되신 하나님과 신부인 교회의 연합이 구원이다. 신랑 신부간의 사랑이야기가 성경책이다. 그런데 계시록은 이렇게 서로 이혼하고 미워하던 관계가 사랑으로 완성되는 그림이다. 그래서 계시록은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마무리 되고 그 신부가 들어갈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런 의미에서 계시록은 종말론이라기 보다는교회론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승리, 완성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래서 교회를 격려하는 편지가 계시록이다.

 

21절을 직역하면 이렇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두에게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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