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교회인데, 왜모여야 하는가? 종교적인 제도교회에서 탈피한 사람들은 진리를 품은 내가 교회인데 굳이 모여서 예배를드려야 하는가? 교회에 꼭 나가야 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진리를 알았다면 굳이 모임에 오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혹은 인터넷만들어도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예배란 설교 잘 들으면 되는 것인가? 혹은단순히 성경공부만을 말하는 것일까? 왜 모여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없이 우리는 당연히 모였으닌까 모인다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런 질문은 어쩌면 당연한 질문인 것같다.
갈만한 교회가 없다고 호소하는 이들이 생기고 있다. 흔히 가나안 교인이다. 안나가를 거꾸로 한 말이다. 가나안 교인들이 급증하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교회 무용론까지주장한다. 정말 교회는 무용한가? 진리를 알았다면 아예 모이지않아도 될까? 그러나 교회는 헬라어 에클레시아[에크 카 레오-ejkklevw]는 불러내어 모으다라는 뜻이다. 단어자체에 모임(assembly-행 19:32, 41)이라는뜻이 있다.
교회에 모인다는 말보다는 교회로 모인다는 말이다. 성도가 교회자체이다. 그리고 그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인 것이다. 그래서 서신서에 보면 ~에 있는 교회…, 이렇게 말한다.
교회는 하나님이 피로 사서 모인 모임이다. 사실 그래서 나를 교회로 모은 것도 하나님이다. 내가 모인 것 같지만, 모은 것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그 생명들이 고동치는 것이다. 그 고백이 찬양이다. 음악에도 솔로라는 것이 있고 합창이라는 것이 있다. 교회는 하나님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이다.
그리고 모은 이유가 바로 예배에 있다. 그리고 예배는 곧 결혼잔치이다. 그 결혼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곧 예배이다. 우리가 모이는 이유도 바로 이 잔치 때문이다. 예배가 왜 잔치일까? 하나 둘 살펴보기로하자!
예배란 과연 무엇일까?
예배하면 대부분 종교적인 행사, 제의 등을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예배도 하나님의 예배이다. 예배는 하나님없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아보자!
4352 proskunevw proskuneo {pros-koo-neh'-o}
4314와 아마2965(의미는‘키스하다’, 주인의 손을‘핥는’개처럼)에서유래;‘아첨하다’, 즉(문자적으로 상징적으로)‘굽실 굽실거리다’, 경의의 표시로‘부복하다’(‘존경하다’,‘공경하다’), 예배드리다<마 4:9; 계13:4>동. to worship;
신약에는 주로 경배하다. 절하다로 번역되어 있다. 예배하다로 번역된 곳은 요한복음 4장이다.
헬라어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έω)는 ‘…를 향하여’의 뜻을 가진 ‘프로스’(πρός)와 아마도‘(기본적으로는 ‘개’라는 뜻이지만 그 ‘개’가 주인의 손을 핥는 것을 암시하는 의미에서) 키스하다’라는 뜻으로 ‘퀴온’(κύων)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존경의 표시로써손에 입맞춤을 하다, (문자적, 상징적으로) 굽실 굽실거리다, (경의의 표시로)부족하다, (동양, 특히 페르시아에서) 깊은 존경의 표시로 무릎을 꿇고 땅에 이마를 대다, (신약에서) 무릎을 꿇거나 엎드림으로 존경하다 또는 순종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단어에서 파생된 명사가 ‘경배자, 예배자’의 뜻을 가진 ‘프로스퀴네테스’(προσκυνητής)가 있다.
신약에서 예배라는 명사가 쓰여지지 않고 대부분 동사를쓰고 있다. 즉 예배자체가 움직인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 의외로, 신약성경에 예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다룬 구절은두 군데 밖에 없다. 바로 요한복음 4장과 롬12:1이다. 나머지는 예배로 번역되어 있지 않고 경배하다, 절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 두 말씀을 통해서 예배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하자!
요4: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주가 선지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일 처음 던졌던 질문이 “예배”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진정한 예배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반증한다.
요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수가성 여인이 가장 궁금했던 주제에 대해 묻는다. 바로 예배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여인이 물었던 질문은 바로예배의 장소의 문제였다. 그녀는 사마리아인이었다. 사마리아인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다고 한다. 이산은 수가성 남쪽에 위치한 그리심산을 뜻한다.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할 것을 주장하였고(신 12:5;16:2), 사마리아 인들은 종교적, 정치적 이유 때문에 그리심산에서 예배 드릴 것을 주장하였다(창 14:18;22:2). 그리심산은 축복의 산으로 알려져 있다.
요4: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예수께서 여인에게내 말을 믿으라고 한다. 그 당시로서는 성전이 없이 예배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 말을 믿으라! 그러므로 내말을 믿으라고 한 것이다. 그림심산도, 예루살렘도 아니라고 하신다. 이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은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님을 말씀하신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지금도 건물없이 예배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사로 잡혀 있다. 그래서 빚을 내더라도 우선 건물부터 짓는다. 그러나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요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너희는 알지못하는 것을 예배한다고 한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믿었다. 예수님은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온다고 하셨다. 무슨말인가?
롬9: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아들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롬9: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온다는 말은 성전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고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알지 못하고 예배를 하는 교회가 너무나 많다. 구원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예배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리심산에 있는 산, 즉 축복의 산이다. 그 장소에 가면 축복받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행7: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행7: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행7: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행7: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행7:50 이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어떤 성전에 거한다는 말인가?
고전3:16 너희는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교회는 옛성전을 대신하는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번째 중요한 원리를 알 수 있다. 예배는 알고 하는 것이고, 그 앎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요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 호라는 “임박한 때” “임박한 시간” “임박한 심판”에 사용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예배할 때가오나니 하고 고 “이 때”라고 한다. 바로지금(nu'n)이라고 한다. 지금은 언제란 말인가? 사마리아 여인이 진정한 남편인 성령을 만났을 때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알지 못하고 예배를 했다. 그러나참되게 예배하는 자는 바로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알고 하는 예배이다. 즉 예배라고 다 예배가 아니다. 아버지가 그런 예배자를 찾는다. 그러나 그러한 자가 없다.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말은 믿는 자들을 그와 같이 만드신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이 찾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예배자(4353 proskunhthv")를 찾아서 예배를 만든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έω)가 말하는 ‘예배하다’라는 의미는 일반적으로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종교에서) 신이나 부처와 같은 초월적 존재 앞에 경배하는 의식을 행하다’라는것과는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을 향하여서 ‘허물과 죄로 죽은 자’라고 말하고 있으면 그런 인간이 초월적 존재를 향하여 경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경배할 능력이 전혀 없는 인간을 향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입맞춤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고 말하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사랑과 은혜가 부어졌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향해서 예배드렸다(προσκυνέω)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원역/ 영이신그 하나님. 그리고 영과 진리로 그를 예배하는 자들을 반드시 예배한다.
영이신 그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그를 예배하는 자들을(그 하나님이)반드시 예배한다.
하나님은 영이란 의미는 육인 인간의 대조적 개념이기도하다. 그 말은 육을 초월한다는 의미이다. 장소를 초월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영이다. 영은 영으로 통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영과 진리를 함께 놓고 있다. 따라서 아무리 화려한 성전을 짓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외쳐도 그 안에 진리가 없으면 “예배”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생각하는 종교행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기독교 신앙 생활에 예배의 핵심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영이란 말이 무엇인가? 이 말을 모르면 예배란 말도 모르는 것이고 신령과 진정이란 의미도 우리 식으로만 안다. 주님은 예배를 말씀하면서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것과 아는 것을 예배하는 것의 차이를 강조했다. 또한 예배에도 때가 있음을, 이 때에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
하나님은 영이란 의미는 인간은 육신이란 말의 반대적 의미로 그 분은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는 강조다. 예배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 행위와는 다른 그 분에 의한 은혜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참으로 예배하려는 자는 하나님과 영과 예배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최소한의 그 예배를 할 수 있을 지를 비로서 안다.
기독교의 예배는 누구나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그런 일반 종교의 의식과는 전혀 다르다. 예배는 그 분을 앎이고 나눔이며 사귐이고 누림이기에 그 분의 섬김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이 우리 예배의 그 때를 이루었고 그리스도의 섬김이 오늘 예배하게 한다.
예배는 그분이 영이시기에 내가 그 영으로가 아니면 할 수 없으며 신령 곧 그 영으로 또 진리로만 할 수 있다. 영과 진리는 하나 임을 그리스도를 통해 알게 된 그것은 복음, 진리, 말씀으로 앎으로만 가능하다.
예배는 내가 그 말씀을 알 때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그 마음 눈을 열 때 비로서 그 분을 알고 그 분과 하나로 가능하다. 오늘 나는 그 때를 살면서 예배할 수 있는자 곧 그 말씀을 아는자로 그 말씀으로 그 분을 알고 대면하는 자인가?
기독교의 예배는 누구나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그런 일반 종교 의식과는 전혀 다르다. 예배는 그분이 영이시기에 내가 그 영으로가 아니면 할 수 없으며 영과 진리로만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영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따라서 은혜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섬김이 전제가 되는 것이다. 예배는 의식이 아니며, 영과 진리로만 가능하다!!! 이러한 사실이 오늘 본문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원어에 보면 예배하는 자들은 복수로 되어 있고, 반드시 예배한다는 3인칭 단수로 되어 있다. 따라서 예배하는 자들이 주어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예배한다의 주어는 호 데오스가 된다.
요4:24은 분명히 하나님이 예배한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예배>라는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종교>에서 정의하는 예배란 신이나 부처와 같은 초월적 존재 앞에 경배하는 의식. 또는 그런 의식을 행함이다. 보통 예배를 인간이 신을 섬기는 제의, 예전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종교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생각의 배후에는 전능한 신에게 무엇인가를 바쳐서 나의 풍요, 평안, 혹은 꿈을 이루는 것이다. 더욱 고상하게는 구원을 얻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구원조차도 욕망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진리이다. 종교와 진리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하겠다.
예배는 영어로 ‘worship’이다. ‘worship’은 흠모, 열렬한사랑이란 뜻이다. 단순히 의식이 아니라 이처럼 예배란 “열렬한 사랑”을 뜻한다. 열렬히 사랑하기 때문에 절도 하고, 경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열렬히 사랑하는 것을 예배하게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열렬히 돈을 사랑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돈에게 예배하고 절을 하게 된다. 인간은 돈, 즉 보이는 것을 사랑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네크로스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 있으니…,
롬 1:7 로마에서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살전 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성도가 받은 것이다.
롬 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신 것이다.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다.
요일4:10 사랑은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예배란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렇다면 예배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시간인 것이다. 이것을 [섬김]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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